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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탐방

  • 북송리 북천수 사진1
  • 북송리 북천수 사진2
  • 북송리 북천수 사진3

포항 북송리 북천수(浦項 北松里 北川藪)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북송리 477
  • 지정분류 : 국가지정문화재 > 천연기념물
  • 지정번호 : 제428호
  • 지정일자 : 2006.3.28
  • 크기/수량/규모 : 국유(5필지, 211,923㎡)
조선 철종 때 흥해군수 이득강이 읍성과 흥해의 진산인 도음산의 맥을 보호하고 흥해의 수해 방지를 위해 군민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고 4리에 걸쳐 숲을 조성한 것이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 숲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흥해현지도』 및 1938년 조사된 『조선의 임수』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 등 역사적 유래가 깊은 숲이다. 수해방지림인 동시에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다.
  • 중성리 신라비 사진1
  • 중성리 신라비 사진2
  • 중성리 신라비 사진3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 지정분류 : 국가지정문화재>국보
  • 지정번호 : 제318호
  • 지정일자 : 2015. 4. 22
  • 크기/수량/규모 : 국유/1기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이제까지의 연구결과를 비추어 볼 때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의 발견장소 또한 냉수리 신라비 발견장소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이며, 비문의 내용도 유사한 점이 많다. 비문의 내용은 지방민이 관여된 재산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판결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해 재발방지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의 유사점이 있다. 이 비문을 통해 당시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지증왕 시대인 501년에 만들었고 비교적 최근인 2009년에 발견됐다. 여러 신라시대 비석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사진1
  •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사진2
  •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사진3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迎日 七浦里 岩刻畵群)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201 외
  • 지정분류 : 국가지정문화재 > 유형문화재
  • 지정번호 : 제249호
  • 지정일시 : 1990.8.7
  • 크기/수량/규모 : 3개소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에 소재한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암각화군(岩刻畵群)은 암반이 사암(砂巖)으로 되어있고 곤륜산 정상에서 흐르는 좁고 깊은 계곡 옆에 돌출된 암면(巖面)에 새겨져 있다. 칠포리 201번지에 소재한 각화(刻畵)가 새겨진 바위는 3개로서, 원 위치에 있는 암각화는 돌출된 암석(巖石)으로 되어있고, 계곡에 떨어진 각화암괴(刻畵巖塊)는 원위치에 있었던 것이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며, 구거옆 바닥에 드러난 각화는 암면의 풍토작용 때문에 많이 마모되어 있다. 암석은 굵은 사암(砂巖)이고, 지상에 돌출된 암괴(巖塊)의 서향면(西向面)에 각화(刻畵)해 두었다.

앞쪽에 조성된 평탄면은 제단이나 의식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각화(刻畵)가 있는 암괴(巖塊)의 크기는 원위치에 있는 것이 폭 3m, 높이 1.8m 인데, 이 암괴의 서향면에 6개의 같은 형(型)의 각화가 전면(全面)을 채우고 있다.

계곡 아래쪽에 떨어진 암괴는 폭 1.4m, 높이 2.2m의 크기이며, 역시 서쪽에 2개의 같은 형태의 각화가 있다. 20m 떨어진 지점의 암각화는 작고 미완성 상태이고, 쪼아파기(pecking) 방법의 선각(線刻)이며, 화형은 가운데가 좁고 상ㆍ하가 벌어지는 실패모양의 도안으로 성혈(性穴)을 새겨두고 있다. 전체 형태는 가운데가 좁아지는 실패모양으로 대전 괴전동 출토 방패형 청동기와도 유사하며 영주시 가흥리 암각화와 기본구도에서 같다. 칠포리 암각화는 청동기시대라고 추측할 뿐 작자, 유래 미상이며 칠포리 201번지 주변 외에도 칠포리 334-1번지(해안도로변), 749번지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 이팝나무 군락지 사진1
  • 이팝나무 군락지 사진2
  • 이팝나무 군락지 사진3

이팝나무 군락지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129-2 외
  • 지정분류 : 도지정문화재 > 기념물
  • 지정번호 : 제21호
  • 지정일시 : 1975.12.30
  • 크기/수량/규모 : 20,168㎡

흥해향교 뒤편 구릉지(丘陵地) 동편에 소재하고 있는 이팝나무는 상수리 나무에 섞여 집단군락을 이루고 있다. 향교 문묘(文廟) 건립 당시 심은 이팝나무에서 종자가 떨어져 이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교목이며, 잎이 길둥글며 마주나고, 늦봄에 흰꽃이 피고, 열매는 가을에 보랏빛으로 익으며 정원수나 풍치목(風致木)으로 좋은 수종이다.

이 곳에는 50~100년 정도의 이팝나무 3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꽃이 개화하면 일대 장관을 이룬다.

  • 남미질부성 사진1
  • 남미질부성 사진2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성리 101 외
  • 지정분류 : 도지정문화재 > 기념물
  • 지정번호 : 제96호
  • 지정일시 : 1994.4.16
  • 크기/수량/규모 : 84,885㎡

남미질부성은 흥해읍 남쪽 평지위에 돌출된 천연적인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성벽은 흙을 이겨서 쌓은 토성(土城)이며, 성벽둘레가 약 2km나 되는 대형급 성곽(大型級 城郭)이다. 성안에는 남성리의 ‘못산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못산마을의 서편 구릉지에는 성주(城主)의 무덤으로 전하는 고분이 7~9기 정도 남아 있다. 또 기록에는 1개의 못과 3개의 우물이 있어서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1개의 못과 1개의 우물이 남아 있다.

이 성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4 지증왕(智證王)5년조(504년)에 나타나는데 여기에 의하면 9월에 사람들을 모아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등 12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미실성(彌實城)’이 이 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 지며 이때 성곽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동국여지승람 22권 흥해군 고적조(古蹟條)에서 고려 태조 13년 북미질부성주(北彌秩夫城主) 훤달(萱達)이 남미질부성주(南彌秩夫城주)와 함께 항복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초기는 흥해군 일대를 다스리는 중심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곽이 ‘미질부성(彌秩夫城)’으로 불리워졌고 서기 504년에 축성되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은 성곽을 연구하는 학자나 고대사(古代史)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대부분의 성곽들은 축성당시의 성곽 이름을 알 수 없어서 행정구역 또는 산이름에 따라 후대에 임의로 붙이는 경우가 많으며 축성연대도 모르고 출토유물만으로 축성연대를 짐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이 성곽은 흥해지역 뿐 아니라 포항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에 해당되며, 늦어도 고려시대까지는 흥해지역을 다스린던 행정의 중심지였다.

  • 흥해향교 대성전 사진1
  • 흥해향교 대성전 사진2

흥해향교 대성전(興海鄕校 大成殿)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132
  • 지정분류 : 도지정문화재 >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 제87호
  • 지정일시 : 1985.8.5
  • 크기/수량/규모 : 정면3칸, 측면3칸

「신증동국여지승람」(권22)에서 군(郡)의 서쪽 1리에 있었다고 하는 흥해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연혁에 관한 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창건연대 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정진백(鄭鎭伯 : 1897~1924)의 문집인 「석농집(石農集)」의 <흥해향교 중수기(興海鄕校 重修記)>에서 “본 군 향교의 설치는 건국으로부터 창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이에 향교가 창건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 흥해지역의 연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흥해는 본래 퇴화군(退火郡)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전국적 군현 개편에 즈음하여 의창군(義昌郡)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초에 현재의 이름인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쳐졌다.

그 후 현종 9년(1018년)에 경주의 속읍이 된 후 명종때 감무가 설치됨으로써 일읍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공민왕 때에 접어들어 국사 배천희(裵千熙)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된 후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일읍으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조선 태조때 지방 향교를 전국적으로 창설할 무렵에 흥해향교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정진백이 본 군 향교 설치는 「자건국이창(自建國而創)」이라 하였던 것이다.

현재 흥해향교에는 조선후기에 작성된 「석전의궤(釋奠儀軌)」가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향교 중수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가 있는데, 우선 정조 즉위년(1776년) 12월 24일의 <대성전 중수시고유문(大成殿 重修時告由文)>과 이듬해 3월 21일의 <환안고유문(還安告由文)>이 실려 있다. 이 때 대성전의 퇴락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졌고 순조 3년(1803년 윤 2월) 동ㆍ서무의 퇴락으로 인한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이안제(移安祭)가 행해졌고, 4월 3일 환안제(還安祭)를 행하였다. 이때의 군수는 이득강(李得江)이다. 또 순조 30년(1830년) 대성전에 비가 새어 기와를 다시 이었으며, 이때 역시 이안제(3월 15일)와 환안제(3월 20일)가 각기 거행되었다고 한다.

「석농집(石農集)」에 의하면 흥해향교는 1920년 정전 및 문루의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일향의 장보(章甫)가 각자 의연금을 내어 교토(校土)에 보태어 기백원을 만들어 향교를 일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흥해향교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7번 국도변 야산에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대성전, 서무, 동무, 명륜당, 서재, 동재, 수복실, 태화루 등이 있었으며 총 99칸의 규모였으나 6ㆍ25 한국전쟁 때 대성전과 동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불타 버리고 없었던 것을 1953년 명륜과 수복실을 신축하고 뒤이어 동ㆍ서무를 복원하였으며, 1990년대에 명륜당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 태화루를 복원하였다.

  • 제남헌 사진1
  • 제남헌 사진2
  • 제남헌 사진2

제남헌(濟南軒)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
  • 지정분류 : 도지정문화재 >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 제250호
  • 지정일시 : 1991.9.6
  • 크기/수량/규모 : 정면7칸, 측면7칸

흥해군(興海郡)의 동헌(東軒)건물이었던 제남헌은 1925년 원래의 자리에서 동남쪽 70m 떨어진 구 흥해읍사무소로 이건하여 흥해읍 회의실로 사용하다가 1976년에 다시 원래 자리인 현 위치에 이건하여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제남헌은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나타난 바와 같이 흥해읍성(興海邑城)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흥해읍성은 일제시대 초기에 모두 헐리고, 성(城)에서 나온 돌은 포항축항흥해공사에 사용되었으며, 관아건물도 이때 모두 헐리고, 제남헌만 남았다.

제남헌의 기록은 이건시에 나왔다고 하는 도광(道光) 15년(1835년)이란 상량문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건립 당시의 상량문인지 중건 상량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 칠인정 사진1
  • 칠인정 사진2
  • 칠인정 사진2

칠인정(七印亭)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 825
  • 지정분류 : 도지정문화재 >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 제369호
  • 지정일시 : 1999.12.30
  • 크기/수량/규모 : 정면3칸, 측면2칸

칠인정은 태종 9년(1409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막돌 기단, 자연석 기초, 원주기둥, 익공식 겹처마,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칠인정은 공민왕 때 흥의위(興義衛) 보승랑장(保勝郞將) 출신인 장표(張彪)의 후손 아들 4명과 3명의 사위가 동시에 문과급제하자 공의 회갑에 이 일곱명이 인통을 휴대하고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 창건 이듬해 봄 정자를 보호하기 위한 담장을 완성하였으며, 정자 앞에 위치한 호수에 쌍계수 맑은 물을 넣어 어양(魚養)하였다. 정자 앞의 쌍괴목 아래에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세청수 맑은 쌍괴수 맛을 겸비하여 약수라 하였고 이로 인해 초곡리마을에 약수가 유명하다고 전래되고 있다. 칠인정의 건립취지와 건축양식은 당시의 시대적인 감각과 사상을 연상할 수 있는 만큼 보존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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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佛像)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 한동대 앞 천마산

천마산 탑다리골(절골)에 머리가 깨진 큰 불상이 하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을 실측한 결과 불상 높이 184cm 가슴둘레 약 300cm 복련 직경 210cm이다. 발 아래는 연화대가 앙련, 복련으로 있고 그 아래는 땅속에 묻혀 있어 알 수 없다. 불상은 입상인데 머리는 없어졌고 가슴, 팔, 앙련 등이 심하게 깨어져 수인, 장식, 지물 등 아무것도 알기 어렵다. 산세는 산태극, 수태극으로 좁은 골짜기에서도 기국을 형성하였고, 불상은 남면하고 있다. 인근 동네 사람들은 이 불상을 '미륵'이라 부르고 있으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의 기자(祈子)신앙의 대상으로 최근까지도 기능을 했다.

이 일대 골짜기가 절골이라 불리며 불탑에서 유래된 '탑다리골'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골짜기에 신라시대 이후로 절과 탑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흔적은 없고 지금 천마 저수지위로 옮겨간 용화사가 불상과 같이 있었다. 복련의 조각은 뚜렷이 보이고, 괴체감으로 보아 고려초의 작품이 아닐까 추정된다.

흥해 방면에서 한동대학교 앞을 지나 바닷가 가는 길을 따라 500m 쯤 가다보면 조그만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쳐다보이는 산이 천마산이고 가을이면 억새꽃이 멋진 그 개울둑길을 따라 1km쯤 가다 보면 이 불상을 볼 수 있다. 흙길이 좋지 않으므로 차는 포장도로에 두고 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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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전설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 천마저수지 밑

흥해읍 곡강리 천마 저수지의 골짜기에는 팔매돌이라 불리는 큰 바윗덩어리가 7~8개 있다. 옛날 한 장수가 망천산에서 돌팔매질을 하여 힘을 기르던 흔적이라고 전해온다. 이 장수가 하루는 자기의 애마가 화살보다 빠르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기 위해 망천산에 올라 활을 쏜 후 쏜살같이 달려 평소가 던져 놓은 팔매돌 부근에 다다랐다. 그러나 화살이 나타나지 않아 이미 어느 숲속에 먼저 도착했다고 단정하고는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애마의 목을 잘라 버렸다. 순간 못둑 서편의 곡강최씨 묘역 아래에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와 깊이 꽂혔다. 화살이 박힌 자리는 명주실 한 타래가 드리워질 정도로 샘이 되었는데, 이에 그 연유하여 이 산 이름을 천마산이라 하고, 동쪽 산머리를 말머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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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능일(朴能一) 비(碑)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우목리 죽천초등학교 동편 바닷가

박능일(朴能一 : 1859.2.29 ~ 1917.7.20)의 호(號)는 무호(無號)이며 본관은 월성(月城)으로 군위군 우보면 호포리에서 출생하여 박춘립(朴春立)공에게 수학(修學)한 후 덕업(德業)을 성취하였다. 국운이 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왜병이 우리 강토를 휩쓸고 다닐 때 국권회복을 위해 충심을 불태웠으나, 나라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져 국권이 왜놈들에게 수침 당함에 의분을 참지 못해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고, 흥해읍 우목리 마을앞 바위위에 "擧其事而生 不若 蹈海而死 朝鮮逸民 朴能一(거기사이생 불약 도해이사 조선일민 박능일)."이란 글자 열아홉자를 새겨놓고 바닷물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나니 그 해가 1917년 여름이었다. 흥해읍 우목리 소재 죽천초등학교 동편 바닷가 언덕에 '朝鮮逸民無號 朴能一蹈海碑(조선일민무호 박능일도해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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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서원터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 서원마을

곡강서원은 1607년(선조 40년)에 임진왜란때 창의한 선비 정삼외(鄭三畏 : 1547~1615)가 흥해의 남송동 서원리에 창건한 것으로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배향하고 1708년(숙종 34년)에 문간공(文簡公) 조경(趙絅 : 판중추증영의정)을 추향하였다. 그 후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곡강어귀 가는 길에 곡강최씨 시조묘를 지나 300m 쯤 오른쪽 산기슭에 영모재가 있는데 그 자리가 서원이 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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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비(忠婢) 순량(順良) 비(碑)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 하수종말처리장 앞

조선 선조 16년 봄날에 흥해군수의 친구인 계림(鷄林) 일사(逸士)가 흥해에 유람와서 명승지를 찾아 여러날 묵게 되었는데, 북미질부성 아래 곡강 어귀에 기암절벽이 둘러싼 풍광을 보며 유람하니 아름다운 한 낭자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워 희롱할 생각으로 시 한수를 크게 소리내어 읊었다. "爾非三尺劍 能斷幾人(너는 삼척검이 아닐진대 몇 장부의 간장을 끊었느냐?)"라고 하자, 낭자가 그 시에 답하기를 "我本荊南和是壁 秦城十五猶不易 偶然流浪曲江頭 況擧鷄林一腐儒 (나는 본시 중국 형남의 화시벽같은 보배로서 진나라 성 15개로도 바꿀 수 없느니라. 우연히 곡강두에 유랑하지만 어찌 계림의 썩은 선비와 같이 하리)" 무안을 당한 계림선비는 흥해군수에게 무례한 낭자를 벌할 것을 권하여 낭자를 체포토록 하였다.

명을 받은 군노사령들이 낭자가 사는 흥안리에 가서는 양반의 거만한 태도가 미워서 동임(洞任)에게 사실을 말하고 낭자가 피신하게 하니 낭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화가 가문에 미칠것을 고민하다가 자결하기로 결심하고 유서를 쓴 후에 몸종인 순량(順良)과 하직하고 북미질부성 아래에 있는 곡강참포관소에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이에 몸종 순량 또한 낭자의 시신을 안은 채 순절하니, 후일 이 소식을 듣고 순량의 충절을 기려 곡강어구 층암(層岩)바위에 충비순량(忠婢順良)의 비(碑)를 암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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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성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136번지

오늘의 경북 동해안 지역은 신라시대부터 왜구침입의 주된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조정, 수령, 주민들은 이지역을 국토방위의 전진기지로서 요새화하고자 꾸준한 노력을 하여 왔다.

옛 문헌에 기록되어 밝혀지는 청하의 개포(介浦), 장기의 포이포(包伊浦), 영일의 통양포(通洋浦), 흥해의 칠포(漆浦) 등의 수군진을 비롯하여 연안 각 고을의 여러 읍성, 산성, 진성(鎭城)안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영일만 지역의 해안이 국방의 중요거점으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이곳이 예로부터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들어가는 어귀가 되어 왜적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숭인(李崇仁)의 <영일읍성기(迎日邑城記)>는 이러한 상황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영일만권의 수군진 설치는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비롯되어 고려,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가장 먼저 수군진을 설치한 곳이 청하의 개포(현재의 월포지역)이다. 개포의 지형은 다른 수군진 설치지역의 지형과 마찬가지로 해안이 U자형 모양으로 육지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가장 깊숙한 안쪽은 조금 높은 평지를 이루어 성과 진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적합하다. 신라시대에는 군영을 설치하여 병선을 배치하고 3곳에 해자(垓子)를 파서 왜구를 막았던 개포는 이후 해문(海門)이 광활하여 항상 풍환(風患)이 발생되는 약점이 있어 영일현의 통양포에 수군진을 옮겨 배치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 우왕 13년(1387년)에 영일현 통양포(현재의 포항시 두호동)에 수군만호진을 설치하여 만호(종4품)를 위시하여 정규 수군과 병선을 배치하여 이 고장은 물론 국가의 방어체제를 새롭게 한 것이다. 만호는 무관직의 하나로 만호, 천호, 백호 등은 본래 그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몽고식 군제의 근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원의 제도를 따라 그대로 썼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차차 민호의 수와는 관계없이 진장의 품위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또 육군보다는 수군에 이 명칭이 남게 되었다.

통양포 수군만호진의 설치는 고려말 1350년부터 시작된 왜구의 약탈이 공민왕 20년(1371년)을 거쳐 우왕때(1375~1387)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고, 이 고장에서도 1380~1381년의 2년 동안 왜구의 큰 병화를 입게 됨에 따라 그들의 침탈을 방지코자 하는 조정과 이 고장 민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같은 배경하에서 흥해읍성과 영일읍성도 각각 1389년과 1390년에 다시 쌓게 된 것이며, 이는 통양포수군만호진과 밀접한 관련하에 구축된 이 고장의 방어선인 것이다. 지금 칠포동네 가운데를 동서로 길게 가로질러 흔적이 남아 있다. 더러는 집의 담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더러는 길을 내면서 잘려져 있다. 한 민가에 남아있는 축성면문에는 '正德十年乙亥造築城"이라는 아홉자가 새겨져 있다.

  • 사진

흥안리 선돌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안리 1

흥해읍 흥안리 밭둑에 있는 선돌이다. 이 마을 앞산이 낚시처럼 생겨서 낚시봉이라 하는데 이 낚시봉과 연결하여 낚시추가 있어야 마을이 평안하다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라 1940년대에 마을에서 세웠다고 한다. 높이 약 140cm, 폭 85cm, 두께 43cm의 판석 모양의 이 선돌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살아 있는 민간신앙의 한 본보기이다. 흥해에서 칠포가는 길을 가다가 흥안리 입구 가게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동네 안쪽으로 가다 끝 지점쯤에서 오른쪽 방향의 밭을 보면 사람 모양을 닮은 선돌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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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곡리 고인돌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곡리 마을 인근

  • 흥해읍에서 신광면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4km가량 따라 가면 호읍천을 막아서 만든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의 농수용 수로를 따라 1km정도 내려오면 용곡리 마을 못 미쳐 수로변에 5기의 고인돌이 있다.
  • 제1호 고인돌
  • - 수로에 연접하여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20×160×90cm 이다.
  • 제2호 고인돌
  • - 제1호에서 2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60×130×75cm 이다.
  • 제3호 고인돌
  • - 제1호에서 북으로 4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0×210×60cm 이며, 성혈이 2개 있다.
  • 제4호 고인돌
  • - 제2호에서 북으로 4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60×210×60cm 이며, 지석 5개가 있다.
  • 제5호 고인돌
  • - 제4호에서 북으로 10m 거리의 과수원 내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80×130×50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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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리 고인돌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일원

  • 칠포에서 구 도로를 따라 흥안으로 가는 우측 산등성이에 5기의 고인돌이 있다.
  • 제1호 고인돌
  • - 고인돌에 선사암각화가 있는 곳에서 약 300m 떨어진 산등성이의 밭둑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0×140×110cm 이고 윗면에 성혈이 9개가 있다.
  • 제2호 고인돌
  • - 제1호에서 서쪽으로 20m 지점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20×130×100cm 이고, 덮개돌이 옆으로 넘어진 것 같으며 측면에 성혈이 9개가 있다.
  • 제3호 고인돌
  • - 제2호에서 윗쪽으로 10m 위에 있으며 밑부분이 많이 파손되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0×130×120cm 이다.
  • 호제4호, 5호 고인돌
  • - 제3호 고인돌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 밑 계곡에 있는 것으로 파손된 흔적이 많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각각 106×100×30cm 이다.
  • 제6호, 7호 고인돌
  • - 칠포중학교 우측의 산등성이에 마을에서 치성을 드리는 칠성바위가 7기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의 덮개돌의 크기는 400×300×400cm 이고, 장축의 방향은 140도이고, 성혈이 있으며, 제일 아랫쪽에 있는 것은 덮개돌의 크기가 300×160×140cm 이고 여기에도 성혈이 있다.
  • 제8호 고인돌
  • - 제7호에서 남쪽으로 20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0×150×100cm 로 일부 파손되어 있다.
  • 제9호 고인돌
  • - 제8호 고인돌에서 남서쪽으로 10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300×30×30cm 로 일부 파손된 흔적이 있으며 성혈이 여러 개 있다. 칠포(강서) 입구의 버스정류소 뒷편의 산등성이에 많은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특히 선사시대 암각화가 발견된 고인돌의 주변에 많이 있다.
  • 제10호 고인돌
  • - 버스정류소 뒤의 밭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5×100cm 이며, 우측편에 마제석촉 모양과 가면 모양의 암각화가 가로 10cm, 세로 20cm로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덮개돌의 일부가 파손된 흔적이 있다.
  • 제11호 고인돌
  • - 암각화가 있는 고인돌에서 약 50cm 윗쪽에 있는 것으로 덮개돌의 크기가 230×210×100cm로 장방형으로 생겼으며, 수십 개의 성혈이 있으며 성혈과 성혈이 홈으로 연결되어 있다.
  • 제12호 고인돌
  • - 제11호에서 동쪽으로 6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60×140×100cm 이고, 성혈이 4개 있으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 제13호 고인돌
  • - 제12호에서 5m 떨어져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가 200×120×120cm 이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 제14호 고인돌
  • - 제11호에서 남서쪽으로 10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70×240×100cm 이고 장방형으로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 제15호 고인돌
  • - 제11호에서 동서쪽으로 30m 거리의 소나무 숲속에 있는 것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230×200×100cm 이다.
  • 제16호 고인돌
  • - 제15호에서 서쪽으로 5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30×260×100cm 이고 성혈이 8개 있다.
  • 제17호 고인돌
  • - 제16호에서 아래쪽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240×140×130cm 이며, 다수의 성혈이 있다.
이 외에도 고인돌로 추정되는 5~6기가 가시덤불과 밭둑의 일부분에 묻혀 있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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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안리 고인돌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안리
  • 흥안 2리 고인돌 : 연돌에서 서북쪽으로 50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 크기 155×160×100cm 이다.
  • 흥안 1리 고인돌 : 흥안 1리 부락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지점의 논에 7개 있다.
  • 제1호 고인돌
  • - 서북쪽으로 위치하며 덮개돌은 사각형으로 크기는 180×120×120cm 이다.
  • 제2호 고인돌
  • - 제1호에서 동쪽으로 9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90×150×80cm 이다.
  • 제3호 고인돌
  • - 제2호에서 북동쪽으로 4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30×100×40cm 이다.
  • 제4호 고인돌
  • - 제3호에서 2.5m 거리에 있으며 경지정리로 이동된 흔적이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30×580×80cm 이다.
  • 제5호 고인돌
  • - 제4호에서 10m 거리에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40×200×90cm 이다.
  • 제6호 고인돌
  • - 제2호에서 남쪽으로 40m 지점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크기는 240×200×90cm 이다.
  • 제7호 고인돌
  • - 제6호에서 4m 거리에 위치하며 부정형의 둥근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석의 유무는 매몰되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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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녀(裵斗女) 효녀비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성리 118-1번지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겼다. 나이 네살때의 일이었다.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서 신음하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 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강가에 빨래하러 간 사이에 아버지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숨을 몰아 쉬게 되었다. 그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내렸다. 그녀는 어린 마음에도 그 피가 아버지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아버지 입에 갖대대고 "아버지 호 해줘, 호 해줘!"하며 울면서 말하니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저절로 병든 아버지 입에 떨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건강을 찾게되니 이 사실이 알려져 하늘이 내린 효녀라 하며 칭찬이 자자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흥해군수가 크게 감탄하여 상을 내리고 1935년 비를 세우게 하고 정려(旌閭)하였다. 그후 평해 황씨 문중에서는 1971년 개비(改碑)한 후 비각(碑閣)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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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천리

진각국사 배천희(1307~1382)는 흥해 태생으로 호(號)는 설산(雪山),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319년(충숙왕 6년) 13세에 화엄(華嚴) 반룡사(盤龍寺)에 들어가 일비대사(一非大師)에게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19세(1325년)에 승과에 급제한 수 금생사 (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符仁寺), 개태사(開泰寺) 등 10여 절의 주지로 지내다가 원나라에 들어가 강남(江南)의 몽산(蒙山)에게서 의발(衣鉢)을 받고 귀국한 후에 치악(雉嶽)에 은거하였고 낙산사(洛山寺)로 역유(歷遊)한 후 공민왕 16년 (1376년) 치악에 환거(還居)하였다. 왕은 유사(遺使)하여 '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總攝(국사대화엄종사선교도총섭)'을 후하고 동 19년에는 인장(印章)과 법의 (法衣)를 하사하였다. 다음해 국사는 경천사(敬天寺)에 있다가 금강산을 순유(巡遊)하던 중 왕이 유사하여 청환(請還)하였고 진각(眞覺)은 치악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다. 다음해 부석사에 들어가 전우(殿宇)를 중영(重營)하게 되었다. 우왕 11년 소백산에서 시적(示寂)하였는데 향령(享齡) 76세 법랍(法臘) 63세였다. 대사가 국사로 책봉되어 대사의 출생지인 흥해가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시호(諡號)는 진각(眞覺), 탑호(塔號)는 대각원조사이며 대사의 비(碑)는 경기도 화성군 광교산 창성사지에 있던 것을 수원성곽 안의 화홍문곁에 전각을 세워 보물 제1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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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곡사(泉谷寺)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천리 796번지

천곡사(泉谷寺)는 신라시대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절 앞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큰 샘이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나았으므로 자장율사를 시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러 곳에 암자터가 남아 있고 부도군도 큰 사찰이었다.
이 절에는 조선시대 숙종이 하사한 붓을 보관해 오다가 한국전쟁때 건물이 불타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옛 건물은 없고 우물도 새로 단장을 했고 부도군도 도로공사로 인하여 절 남쪽으로 옮겼다. 사적비는 부도 밭 안에 있다. 천곡사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천곡사 내에는 석천(石泉)이라는 샘이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피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마침 석천의 소문을 들은 신하가 동쪽 도음산 천곡령(泉谷嶺) 아래 효험있는 샘에 가서 씻을 것을 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왕은 안강, 기계, 신광을 거쳐 흥해 천곡령에 도착하여 석천에 목욕을 하고 나니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여왕은 너무나 신기하고 고마워서 자장율사로 하여금 그 곳에다 절을 짓도록 명하고 이름을 '천곡사'라고 하였다 한다.

또 고려말에 이 절의 한 중이 괴력(怪力)을 얻어 민가의 규수를 농락하는 일이 빈발하므로 관가에서 잡아들여 힘의 근원을 물으니, 10년간 이 절에서 나는 먹은 탓이라 했다. 그래서 관에서는 그 중이 먹었다는 샘을 메우고 그 자리에 변소를 짓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절은 안타깝게도 한국전쟁때 전소되었으나 석천만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채 아직도 그 맑음을 자랑하고 있다. [찾아오는 길]달전 검문소 못 미쳐 7번 국도에서 왼쪽으로 계곡 깊이 있는 동네가 학천리다. 학천리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아름드리 벗나무가 있는 저수지가 나오는데 다시 도음산 속으로 달리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천곡사 주차장이 나온다. 길 오른편 산기슭에 배천희 국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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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번지(영일민속박물관 내)
조선시대 지상학자(地相學者 : 풍수) 이성지(李聖智)가 영남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경상도에 이르러 흥해를 지날 때 동해 명산인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勝地)라 하였다고 한다. 당대의 이름난 풍수요, 어전(御殿) 관상감인 이성지라 흥해군수도 그를 소홀히 대접할 수 없어 성대히 잔치를 베풀어 환대를 하였는데, 그 연석에서 이성지가 흥해군수 이하 여러 참석자들에게 말하기를 "흥해는 반드시 다풍질(多風疾)이며,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유손이 세거할 곳이 못된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고찰해 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는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 만년 동안 호수였던 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 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는 물 걱정이 없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을 것이므로 풍다(風多), 습다(濕多)의 피해가 반드시 있어 필시 괴질병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 이 풍습기를 방지하는 방법으로서는 집집마다 회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다. 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습기를 섭취하는 양이 4~5배이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흥해군수는 명령을 내려 이유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회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물좋고 농사 잘 되고, 또한 사람살기에 적당한 이름난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일민속박물관 내의 회화나무와 중성1리, 망천리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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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덕사(淸德祠)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성리 권무정 북쪽
권무정과 관련있는 김영수(金永綏)와 유응환(兪膺煥) 흥해군수를 제사 지내던 건물이다.(조선 중기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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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안2리
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은 흥해읍 흥안2리(일명 : 낚시봉)에 있으며,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과 같은 시기 즉 신라 지증왕 5년(504년) 9월에 역부(役夫)들을 징집하여 흙으로 축성한 토성이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4>> 이 성은 곡강천이 굽이쳐 흐르다가 암벽을 깍아 50여m의 절벽을 이룬 곡강 어귀 윗쪽에 위치하여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서 신라 동북방 육익에 속하는 신라의 동북방 전초기지적 역할을 충분히 담당하였던 곳이며, 성의 둘레가 5,500척이고 성내에서는 일지삼정(一池三井)이 있었으나, 지금은 형태만 남아있다. 북미질부성은 축성된 지 425년 뒤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이 성의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더불어 태조(왕건)에게 항복하여(동국여지승람 흥해동편) 고려에 속하였으나, 원종 2년(1011년)에 흥해읍성이 축성됨에 따라 성의 기능이 약화되어 흥해군의 주변성으로서 조선시대 중엽까지 동북 해적을 막는 기지역할을 했다. 현재에는 성의 흔적만 남아 있고 성터에는 수십 기의 묘지가 형성되고 잡초만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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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정(勸武亭)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성1리
흥해읍 남성 1리에 있다. 조선조 영조때 김영수(金永綏) 흥해군수가 궁술연마장으로 창건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자연붕괴 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됐다. 뜰에는 몇 개의 비가 서 있는데 그 중에 '청덕사' 쪽에 있는 큰 비가 '흥해구제기적비'이다. '청덕사'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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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읍성(興海邑城)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1 로타리 북편 일원
고려 현종 2년에 동해안 여러 곳에 성을 쌓을 때 오늘날 흥해읍 성내리 자리에 새로운 토성을 쌓았다. 이러한 사이 흥해읍성도 근 380여년을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을 잃고 토성의 취약점이 드러나자, 다시 그 자리에 돌로서 성첩(城堞)을 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공민왕 1년 : 1389년) 이러한 축성은 말할 것도 없이 왜구를 막기 위함이었다. 고려말 충정왕 2년(1350년) 왜구의 본격적인 침입이 시작된 후 왜구를 막기 위하여 흥해읍성이 축성되었으며 그 축성 과정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2의 권근(權近)의 흥해읍성기문(興海邑城記文)에 잘 나타나 있다. 고개를 넘어 동남쪽으로 가면 바다 수백리에 이르는데 군(郡)이 있으니 흥해이다. 땅이 제일 끝까지 가다가 막혔는데 물고기와 소금과 땅이 기름져서 이로움이 있다. 그 옛날에 여기 사는 백성들이 이미 편안하더니 중간에 왜적의 난을 입고 나서부터 점점 메마르고 황폐해 갔다. 마침내 경신년(우왕 6년 : 1380년) 여름에 이르러 더욱 화를 입어 고을이 함락되어 백성들이 학살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없어지고 그 중에 겨우 벗어난 자는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났었다. 마을은 빈터만 남았고 무성한 나무들만 길을 가리니, 이 고을 원이 마을에 가서 살면서 감히 고을 속에 들어오지 못한 지 수 년씩 되었다. 정묘년(우왕 13년 : 1387년)에 이르러 국가에서 군 남쪽에 병선을 배치하여 적들이 오는 길을 막은 연후에야(통양포 수군만호진 설치를 말함) 떠돌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종 2년(1011년)에 축성한 토성이 378년 가까이 이 곳 주민들과 함께 풍상을 겪으면서 그 성지(城址)의 견고함을 잃어갔기 때문에 이를 의지하여 살지 못하고 왕왕이 산골짜기에 굴을 파서 자취를 감춰 지내다가 때대로 나와서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다가 왜적이 이르면 도망해 숨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재(守宰)들이 먼 마을에 살고 감히 오지 못하기는 전과 같았다. 무진년(1388년) 겨울에 김제(金堤) 조우량(趙友良) 후(候)가 원이 되어 단기(單騎)로 와서 마음을 다하여 다스리더니 이듬해가 되자 정사도 닦아지고 백성들도 화평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사람들에게 묻기를 "우리 고을에는 성이 없어서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기로 내 성을 만들어 쌓고자 하는데 너희는 이것을 꺼리는가? 아닌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진실로 우리들이 원하는 바이온데 누가 감히 꺼리겠습니까?"했다. 이에 이것을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여 인부를 보내달라 청했으나 이것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이에 군민(郡民)의 노유(老幼) 겨우 수십명을 합해서 8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친히 채찍을 잡고 감독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부지런한 자는 위로하고 게으른자는 경계해서 백성들은 수고롭히지도 않고 엄하게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조정에 말해서 다시 오기를 청했으나 이루지 못하고도 그 일을 기록하여 성루(城樓)에 걸어두어 생각을 버리려는 마을에 붙이려 했으나 이것도 부탁할 곳이 없다. 경오년(1390년) 봄에 내가 이 곳으로 귀양왔더니 이 때 만호 백공이 원이 되어 조후(趙候)가 다하지 못한 것을 더욱 이루어 못을 파서 밖으로 형세를 험하게 하고 문에 자물쇠를 채워 그 안을 견고하게 한 뒤에 그 성이 더욱 완전히 굳어졌다. 흥해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49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3곳이 있었고, 남북에 2문(門)을 두게 되었다. 흥해 주민들은 1390년 봄에 이곳에 귀양온 여말(麗末)의 학자 권근에게 훌륭한 조후의 덕을 기리는 글을 남겨 달라는 부탁을 하자 권근이 "맹자도 지리가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명구(名句)를 들어 인화의 큰 뜻을 밝힌 조후의 공덕을(興海邑城記文)에 기록하여 후대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현재 흥해읍성은 성내리 일부 지역에 큰 돌만 몇 개 남아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 옛 성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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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이씨 열녀비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마산리 대성아파트 단지 입구
절부곡강최도흥처영양이씨지려(節婦曲江崔道興妻永陽李氏之閭) 열녀 이씨는 조선조 영조때 사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성품이 곱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19세때 곡강 최씨 가문에 출가한 후에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남편을 잘 섬겨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우연히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이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돌보면서 선약(仙藥)을 구하여 간호하였으나 별다른 효험이 없어 병세가 악화되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씨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사랑하는 남편의 뒤를 따라 순절하기로 결심하고 남편의 장례를 지낸 다음 남몰래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영조 13년에 흥해읍 마산리에 열녀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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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허대(臨虛臺)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1리 흥해향교 뒤편
현재 향교산이라 부르는 산을 말한다. 둘레 300여m, 높이 20여m의 산 정상을 임허대(臨虛臺)라 한다. 옛날에는 와우대(臥牛臺)라고도 불렀는데, 이 산의 형국이 누운 소의 모양이라 한데서 비롯됐다. 풍수설에 따르면 와우대 앞에 동쪽으로 속초대(束草臺)라 하여 소의 먹이인 풀밭을 조성하여 보호하였다 하나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흥해향교와 임허사가 있고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특히 이팝나무 군락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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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곡사 석천(전설)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천리 796번지
흥해읍 학천리에 있는 천곡이라는 유명한 샘이 있다. 항상 맑은 물이 홍수가 지나거나 가뭄 때에도 일정한 양이 솟아나며, 이 물을 마시면 만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한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피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던 중 한 신하의 말이 "동해안 천곡령(泉谷嶺)이라는 고개 아래 효험이 있는 묘한 샘이 솟아나니, 그곳에서 목욕을 하시면 대왕님의 병이 완치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한번 시험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왕은 안강, 기계, 신광을 거쳐 흥해 천곡령에 도착하여 천곡에 목욕을 하니, 씻은 듯 피부병이 완치가 되었다고 한다. 여왕은 매우 신기하고 효험이 있는 샘물이라 자장율사(慈藏律師)로 하여금 그 곳 이름을 일명 천곡사(泉谷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천곡사의 절은 아깝게도 한국전쟁때 전소되었으나, 이 석천만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채 마르지 않고 아직도 그 맑음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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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리 참새미(전설)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곡2리
흥해군 서면(西面)지역의 성하(城下), 충곡(忠谷), 냉천(冷泉), 마장(馬場), 소푸리, 점촌(店村), 구억(九億)과 같은 자연부락을 1914년 통폐합하여 성하와 충곡의 한자씩을 따서 성곡동이라하여 달전면에 편입시켰던 마을이다. 근년에 이르러 포항시의 확대에 따라 휴게소, 공장, 음식점, 주택 등이 늘어나면서 발전하고 있다. 참새미-참새이-냉천(冷泉)-성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약 200여년 전에 희덕의 선조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에 사람이 살게되고 당장 먹을 물이 필요하게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샘을 파기로 하고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을 찾아내는 풍습대로 놋그릇에 물을 떠 새벽별 세개가 비치는 곳을 찾아 이곳을 다닌 끝에 지금의 곳에서 별 세개가 어리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 장소에 우물을 파고 애써 판 우물의 맛을 좋게 하고자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피부병 치료로 널리 알려진 천곡사의 물길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두루미(물긷는 항아리)에 천곡사의 물을 담고 삼을 드리워 마을 우물까지 물을 조금씩 흘리며 물길을 표시해주자 천곡사의 물의 한 지류가 이 물길을 따라 마을 우물로 찾아 들게 되었다. 그 후 이 곳 우물의 물이 매우 차고 맛이 좋아 유명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참샘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을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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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장리 별래재(전설)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장리
흥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청하면과 경계되는 고개가 있는데 이 지명을 별래재라고 한다. 별래재는 웃장자 동쪽에 있는 고개로 흥해에서 청하로 넘어가는 곳으로 전에는 도둑이 많이 있어서 별을 보면 이 고개를 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한다. 선조때 어득강(漁得江)이 흥해군수가 되어 군내를 순회하다가 이 고개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말하기를 "내 성이 어(漁)가인데, 고기가 벼리속에 들면 죽는 것이니, 벼릿줄을 빨리 끊어야 한다."하고 사람들을 시켜 이 고개를 끊었는데, 민폐가 너무 많아서 경상감사가 이 일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군수도 파면시켰으므로, 지금까지도 흥해 사람들에게 '반풍수가 집안을 망친다'는 속담이 전해져 오고 있다한다. 참고문헌 : 영일군사,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