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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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興海)

흥해(興海)는 먼 옛날 선사시대에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나 흥해 전체가 물에 잠겨 큰 호수(湖水)로 변했다. 반만년(數萬年) 동안 호수였던 곳을 동편(東便)의 곡강(曲江)어귀에 산맥(山脈)을 절단(切斷)하여 그곳으로 호수(湖水)의 물이 흘러가게 하여 평야(平野)를 이루게 함으로서 가뭄에는 물 걱정이 없고 습기(濕氣)가 많은 지역(地域)으로 항상(恒常) 바다와 함께 흥(興) 한다 하여 흥해(興海)라 불려지고 있다.

대련리(大蓮里)

1914년 대곡(1里), 연화(2里), 덕성(3里)과 같은 자연부락을 통폐합하여 대곡(大谷)과 연화(蓮花)의 이름을 따서 대련(大蓮) 이라 하고 달전면에 편입하였다.

대곡(大谷) · 하일(荷日)

  • 대련천 상류에 위치하며 골짜기가 크다고 대곡이라 했다. 한편 마을 동쪽 계곡을 따라 연화동에 이르도록 연(蓮)이 많아 꽃이 필 때 그 경관이 아름다워 하일(荷日)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700여 년 전 문흥이란 선비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삼월 삼짇날 오수정(五樹亭) 제당에서 동제사를 지내왔다. 마을에 포항~기계간 31번 국도와 강동~흥해간 28번 국도가 통과하며, 클로버형 교차로가 건설 중에 있다.

연화동(蓮花洞)

  • 월성이씨가 터전을 닦았다 하며 연(蓮)을 재배하던 연당이 많았던 마을이라 전한다. 동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대련교회와 대련기도원이 있다.

이인리

1914년 초리(初里)와 인제동(仁堤洞)을 합하여 이인동(里仁洞)이라 하고 달전면에 편입시켰었다. 1리에는 초리, 의현, 2리에는 인제, 안태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초곡(初谷)

  • 파평 윤씨가 1,000년 전에 개척한 마을이라 하며 인근 부락 중에서 처음 생긴 곳이기에 초곡이라 불렀다 한다. 달전 초등학교와 이인교회가 있다. 한때 달전 면사무소가 있다가 성하로 옮겨갔다.

의현동(義峴洞)

  • 소티재 국도변에 위치하며, 새마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소티재(小峴·牛峴)에 위치한다 하여 의현(義峴)이라 했다 한다.

어리못골(御米洞) · 인제동(仁堤洞)

  • 지금은 어미골과 인제동이 합하여져 있는데 원래 어미골은 현재마을 아래쪽이 된다. 이 골짜기에서 생산되는 유도비가 품질이 우수하여 대궐에 납품되었으므로 어미(御米)골이라 하고, 그 위의 못을 어리 못이라 했는데, 조선조 초기에 홍수로 못 둑이 터지자 그 못 안 터에 마을이 형성되어 인제동, 어리못골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마을 위쪽 산록에는 주민들이「동네어른」이라 숭앙하는 회화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정씨 마당에 남아있다. 축산물도 축장이 건설되고 있다.

안태(安基)

  • 초곡의 안쪽이 된다 하여 안태라 불리었다 한다.

성곡리(城谷里)

성하(城下), 충곡(忠谷), 냉천(冷泉), 마장(馬場), 소푸리(沼蒲里), 점촌(店村), 구억(九億)과 같은 자연부락을 1914년 통폐합하여 성하와 충곡의 각 1자를 따서 성곡(城谷)이라 하여 달전면에 편입했던 마을이다. 주변경치가 아름다워 고죽령청풍(孤竹嶺靑風), 광정봉낙하(廣鼎峰落霞), 장백산록죽(長柏山綠竹), 신산협청송(新山峽靑松), 대보평농가(大洑坪農歌), 어용곡절벽(魚龍谷絶壁), 정자려고목(亭子閭古木), 수구등모연(水口嶝暮煙)을 성동2리에 거주하시다 1976년에 작고한 오극상(吳極象)님이 1967년도 발행한 일월향지(日月鄕誌)의 22페이지에 처음으로 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서 상성팔경(上城八景)으로 전해지고 있다.

말맛[馬場·馬坪]

  • 1리로 조선조 효종6년 (1655) 대동배(大冬背)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토성을 쌓고 말을 사육하던 곳이며, 옛날에는 흥해 권무정의 궁사들이 말 타는 연습을 이곳에서 했다고 한다.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소포리(沼蒲里)

  • 1리로 말먹이 풀이 많이 자라는 연못인 소포(沼蒲)가 있었다 하여 소포리라 불리었다고도 하며, 소풀이 많이 난다 하여 소풀리라 했다고 한다. 옛날 많이 뛰놀던 숲이라 전하는 서리미[設林]숲에 제당이 위치한다.

나환자촌[애도원]

  • 1리로 딴낫골이라고도 부르며, 6.25이후 개신교 재단에서 음성 나환자를 수용하기 위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양돈, 양계로 유명한 마을이다. 성곡교회가 있다.

찬샘이[冷泉]

  • 2리로 200여 년 전 회덕 황씨가 터를 잡은 마을로, 물이 차고 맛 좋은 샘이 있다 하여 찬샘이라 불렀다 한다. 음력 6월 15일 우물 옆 돌 제단에서 동제를 지낸다. 달전제일교회가 있다.

점촌·주막(酒幕)

  • 2리로 상점과 주막이 있었기에 동명을 점촌 혹은 주촌이라 했다. 동네 어귀에 한때 달전지서가 있었다.

성하(城下)

  • 2리로 마장성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하리라 불렀다 한다. 달전 검문소가 있고, 달전면 사무소가 이 마을 어귀에 인건되어 있었다.

구억(九億)

  • 안동 권씨가 터전을 이룩한 마을이라 하며, 사일마을과의 경계지점에 아홉 명의 억대 부자가 살았다하여 구억이라 불리었다 한다. 3월 삼짇날 동 제사를 지내왔었다. 금강정사(佛敎講學)가 있다.

충곡(忠谷)

  • 3리로 충신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충곡(忠谷)이라 했다는 설과 학천과 성곡에 걸친 남서방위의산이 학의 형국이고 이 마을이 그 학의 먹이가 되는 위치라 하여 충곡(蟲谷)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삼월 삼짇날 동제사를 지낸다.

학천리(鶴川里)

1914년 학림(1里), 천상(2里), 강당(講堂)을 합하여 학천이라 하였다. 서편 절골의 천곡사 수원지는 1998년 예니호 내습으로 기능이 상실되었다.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의사의 고향이다.

학림(鶴林)

  • 상천(上川)변 큰 바위 주위의 노송림에 학이 서식했다 하여 학림이라 불리었다. 정월 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절골

  • 학림동의 서쪽 천곡사수원지 어귀에 형성된 마을이다. 도음산(383m) 정상을 향해 오르면 천곡사(泉谷寺)가 있다. 9인의 대사 부도(浮屠)와 천곡사 사적비 및 남암(南庵)이 있다. 절 어귀에 배천희국 사사당(裵千熙國 師詞堂)이 있다.

강당(講堂)

  • 조선 영조대의 선비 최천익(崔天翼) 진사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당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강당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뒤쪽 1㎞ 지점 야산에 위치한 농산물종합시장 건설 작업 시에 여러 시대에 걸친 고분과 각종 유물이 발굴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내맏이(川上)

  • 학천의 윗등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천상이라 하며, 학천 마을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마을이라 하여 내맏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 마을은 현재의 마을에서 북쪽 100여 보 거리에 있었는데, 일제시대(1926년 3월)에 천곡사 수원지가 건설됨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정월 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초곡리(草谷里)

윗사일과 아랫사일, 베다니아, 새마을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윗사일

  • 사일(士逸)이라 부른 것은 여말의 보승랑장(保勝郞將) 장표(張彪)가 이 마을 동북쪽 초막(草幕)골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으므로 초곡(草谷), 혹은 사일(士逸)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하며, 또는 옛날 아랫사일 마을 어귀에 큰 숲이 있어서 왜구들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선비들이 사는 안일한 마을이어서 사일(士逸)이라 했다 전한다. 인동 장씨 집성촌으로 칠인정(七印亭)이 있는데, 나라에 우환이 닥칠 때면 소리내어 운다는 쌍간(雙幹)의 느티나무(가슴둘레 3m, 300여 년생)가 정자 앞에 있어 쌍규정(雙槻亭) 혹은 쌍괴정(雙槐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칠인정 앞에 작은 연못주 위에 300여 년생의 백일홍이 2그루 있다. 초막골에는 이 마을 입향조 장표의 묘와 재실이 있다.

아랫사일

  • 주로 인동 장씨가 집성 세거하고 동제사를 지내왔다. 1965년 3월 1일에 개교하여 19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달전초등학교 초곡분교가 있었으나, 1994년 3월 1일 달전초등학교로 통합되었으며, 터는 매각되었다. 마을 입구에 사립 선린대학(善隣大學)과 연일정씨 재실 경모정(景慕亭)이 있다.

새마을

  • 월남전 참전해병 상이용사 정착마을로 야산을 개간하여 농업단지를 형성했던 곳이다.

베다니아

  • 음성나병환자 수용마을로서 70여 호가 양계를 주업으로 하며 살았으나, 주택단지 개발지구로 지정 되어서 1994년에 성곡리로 이주하였다. 죽도천주교회 공원묘지가 있다.

매산리(梅山里)

1914년 기산(箕山), 용산(龍山), 매곡(梅谷), 백련(白蓮)을 합하여 매산(梅山)이라 하였다. 용연지가 건설되기 전에는 사시사철 많은 양의 물이 솟아올라 식수 해결과 농사짓기에 유리 하여 많은 가구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동제(洞祭)는 일제 때 폐지되었다.

심곡골(深谷)

  • 계곡이 깊어 불린 마을 명으로 옛날부터 산송이가 유명하다. 조성목(趙性穆) 독립 유공자의 묘가 있다.

용산(龍山)

  • 300여 년 전 월성 손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용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명이 되었다.

매일(梅日) · 매곡(梅谷)

  • 월성 손씨가 200여 년 전에 일군 마을이다.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의 명당 터에 형성되어 매일, 매곡이라 불렀다 한다.

치미 · 치산(箕山)

  • 흔히 용산, 치산, 큰 동네를 통칭하여 매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큰동네 북쪽 길 건너 마을로 50여 호 살고 있다. 앞산의 모습이 치[箕]('키'의 방언)를 닮아 불린 이름이다. 이 마을 뒤에 포항시 농업기술센터가 들어서 있다.

백련(白蓮)

  • 도음산 북동쪽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백련사(白連寺)란 작은 절이 있다. 160여년 전부터 마을을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각종 식당·여관들이 들어서 있다.

북송리(北松里)

두내와 양촌(陽村),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을 합하여 1914년 북송(北松)이라 했다. 조선 철종 때 흥해군수 이득강(李得江)이 곡강천(曲江川)에 제방을 쌓고 4리에 뻗친 송림(北川藪)을 조성 하였으므로 북송(北松)이라 부른다. 고종 때 지홍관(池弘寬) 군수가 주도하여 고쳐 쌓았다 한다. 동제사는 건너각단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지낸다.

큰마을

  • 신광 가는 도로변 북쪽에 위치하며 가장 큰 동네로서 중심마을이다. 이 마을과 양촌리 사이에 신광 마북 저수지 축조로 인한 침수지역 이주민 34호가 1994년부터 집단거주 지역을 형성해서 살고 있다.

건너각단

  • 연안 차씨(車氏)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영일 정씨 묘역에 동제당과 이득강 군수와 지홍관 군수의 유공비가 있다.

양촌(陽村)

  • 조선조 말엽 류양촌(柳良村)이 귀양살이를 했다 하여 양촌(良村)이라 부른 것이 양촌(陽村)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터주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북천방 새각단

  • 근세에 북천방 가까이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흥해서부초등학교가 있다.

마산리(馬山里)

흥해군 서부면에 속했을 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앞산을 말머리산(馬頭山)이나 말뫼(馬山)라 부른데 연유한다고도 하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훈련 나온 병사들이 말을 매어 두던 곳이 있었던 이유로 마장동(馬場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200여 년 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며, 동제사는 음력 8월 11일과 10월 9일에 지낸다. 1979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남쪽 말뫼산록에 17호가 들어서면서 여러 공동 주택이 건립되어 큰 마을로 변모하였다.

1리

  • 1993년 세종황제맨션을 시작으로 대흥온천맨션, 한동맨션 등의 공동주택이 들어서 있고 자연부락과 합쳐 887호가 거주하고 있다. 청룡사(靑龍寺), 포항전신전화국 흥해분국이 있다. 마을 서남쪽에 옛날 대추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대추밭걸이 있고 그 앞에 탕건처럼 생긴 탕건산이 있다. 산꼭대기에 고려장(高麗葬)을 했다는 큰 무덤이 있다.

2리

  • 마산사거리 동쪽 옛날 사과 과수원 일대에 대성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많은 아파트가 세워졌다. 대성아파트 입구에 절부(節婦) 영양이씨의 비(曲江崔氏妻英陽李氏碑)가 있다.

옥성리(玉城里)

1914년 교동(校洞), 죽림동(竹林洞), 옥동(玉洞), 성서동(城西洞), 성동(城洞), 신정동(新井洞-일명 神堂谷)을 합하여 옥성(玉城)이라 하였다. 향교(鄕校)가 있는 흥발산(興發山-일명 鄕校山) 주위에 1리 신당곡(神堂谷)에 2리가 위치한다.

옥동(玉洞)

  • 흥해군 시대에 이르도록 향교산 북쪽 흥해 제일교회 일원에 옥(獄)이 있어 옥(獄)거리, 옥리, 옥동 (獄洞)이라 부르던 것을 옥동(玉洞)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흥해중학교, 포항농지개량조합이 있다. 향교와 체육공원과 임허사(臨墟寺)가 이팝나무숲(지방기념물 제21호)속에 있는 향교산은 소가 누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화우산(臥牛山), 와우대(臥牛臺)라고도 부르며, 임허산, 임허대, 흥발산이라고도 부른다. 이팝청년회가 조직되어 (1991.12)가 매년 이팝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신당곡 · 신정동(神堂谷 · 新井洞)

  • 1554년경 남원 양씨(南原梁氏)가 숲을 치고 정착하면서 앞산에 신당(神堂)을 두어서, 또는 사직단(社稷壇)이 있어서 시니당골이라 불리었고, 100여 년 전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새 우물을 팠으므로 신정동(新井洞)이라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흥해공업고등학교(구 흥해고등학교. 1977년 설립화), 주택 22호(1979년 건립), 녹원빌라 등이 들어서 있다. 흥해공고 정구장 왼쪽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읍사무소 뒤에는 처음 망창산(望昌山)에 건립되어(1951.5.5) 통일동산을 거쳐(1971) 1996년에 이곳으로 재이건한 반공애국자위령탑이 있는데, 이 탑의 글은 이은상(李殷相)선생이 찬(撰)하였다. 1996년 12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읍청사 부지 정리 공사 때 여러 시기에 걸친 고분과 토기가 발굴되었다. 마을 동남쪽 흥해 성광교회 부근에 약 5,000여 평 규모의 서림못(서림지, 서리베, 새둑못)이 있는데 조선 숙종 때 흥해군수 이의활(李宜活)이 막았다고 한다. 연꽃이 자생한다.

성내리(城內里)

고려 우왕 15년 돌로 다시 쌓은 둘레 1,493척(실측 약 800m)의 흥해 읍성지를 따라 그 안팎으로 형성된 북성(北城), 서성(西城), 동성(東城)을 합하여 1914년 성내(城內)라 하였다. 후에 남문 안쪽에 마을(南城內·南門안)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 이후 시장과 각종 상점이 많이 입주한 흥해의 중심 시가지로 되었다. 옛 관아터에는 포항문화원 사회교육관(구 영일문화원)과 영일민속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1924년 구 읍 사무소 터에 이건하였던 제남헌(濟南軒)이 1976년 다시 원위치의 10여m 남쪽에 이건되어 민속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앞뜰에는 500여 년생 회화나무(가슴둘레6.5m)가 두 그루 남아 있다. 현 흥해 보건지소(구 흡청사)의 불망비들과 한말의 병항왜혈전기념비가 민속 박물관에 옮겨 세워져 있다. 읍성의 석축 흔적은 현 민속박물관 서쪽 담 밖과 남문지(址)에, 그리고 동문지(址)에 일부씩 남아 있다. 옛 객사(客舍)터 북쪽에 흥해파출소가 있고, 마주하여 흥해농협이 자리한다. 객사터 동쪽은 시장이 형성 되어 있다. 구 흥해읍사무소는 옛 관아지(官衙址) 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벽의 돌은 일제 때 포항축항공사(浦項築港工事 )에 이용 되었다 한다.

남성리(南城里)

흥해읍 성터 남쪽에 형성된 마을로서 1914년 남문밖, 못산[池山](못안), 배말곶이(배말꼭대기), 구름다리(雲橋), 산메기, 성황동, 양곡(暘谷)을 합하여 남성(南城)이라 하였다. 1989년부터 배말곶이 앞들에서 남미질부성 북편에 이르는 대단위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2,073호의 큰 마을로 변모하였다.

남문밖 · 남문동(南門洞)

  • 남문터에서 남쪽으로 형성된 큰 마을이다. 흥해우체국이 남성문지(南門城址) 앞에 있다.

배말곶이 · 배말꼭대기

  • 지형이 약간 솟은 곳으로서 옛날 배를 매었다는 구전에 따라 지어진 지명이라 한다. 마을 앞에 권무정(權武亭)과 청덕사(淸德祠)가 있고 그 뜰에 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記積碑)와 다섯 개의 선정비가 있다. 권무정은 조선순종 12년 군수 김영수가 금500냥을 들여 건립한 것으로 이 고을 청장년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남미질부성 바로 북편에 흥해남산초등학교(1998년 개교)가 있다.

못산(池山) · 못안

  • 신라시대에 쌓았다는 남미질부성지(南彌秩夫城址)의 성내(城內)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까지 못가의 성황당에서 행해지던 동제의 유습이 벌천(伐泉)마을로 옮겨져 이어지고 있다. 못의 동북에 있는 망창산(望昌山.41m) 서편 산허리에 전파감시소가 있다가 폐지되었다. 장승배기에 배두여 정여각(裵斗汝 旌閭閣)과 SGI한국불교 흥해회관이 있다. 동제사는 마을 남동쪽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지낸다.

양촌(暘谷)

  • 권무정의 서편 옥성리와의 경계지점에 있었던 마을이라 전한다.

남송리(南松里)

1914년 남대동(南大洞), 송동(松洞), 남휴동(南休洞), 서원동(書院洞)을 합하여 남송(南松)이라 하였다.

마들

  • 남송 1리에 해당하며, 해방후에 조성된 마을로 작은 하천을 경계로 성곡리와 나뉜다. 흥해읍성과 수군만호진기(水軍萬戶鎭基)였던 두무치(두호동)와의 주도로가 이 마을과 새터 사이를 지났다. 말이 사육되는 곳이었기에 불리워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의송교회가 있다.

새터 · 남휴동(南休洞)

  • 1리로 250여 년 전 김해김씨가 마을을 일구었다 하며, 해방 후 새로이 커진 마을이 되었다 하여 새터라 불렀다 한다. 흥해 군수가 부임할 때에는 그 외 두무치나 읍성을 오가는 관리들이 이 마을에서 쉬어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남휴동이라 했다 한다. 한동어린이집(1996년 개원)이 있고, 송림 속 제당에서 6년 전까지 동제사를 지냈다.

송동(松洞)

  • 2리로 소나무와 관계되는 지명은 난을 무사히 피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서 월성박씨와 월성최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난을 무사히 피했다는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솔씨 10개를 심은 것이 자라나 지금은 아름드리 소나무로 변해서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일제시대에 지게로 흙을 쳐서 막은 3,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쉽게 타지로 떠나지 못하도록 40여 년 전에 소쿠리 입구에 해당하는 이 못 둑에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15년 전까지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냈다. 송림사가 있다.

짓댕이(池塘)

  • 3리로 못 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지당(池塘)이라 했다고도 하며, 주위의 토질이 비만 오면 몹시 질컥거리는 질땅이란 뜻으로 짓댕이(池塘里)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앞에 2,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고 못 앞 야산 뒷자락에 두산 포도농원이 있던 자리에 한동대학교(1995년 개)가 들어서 있다. 뻣재말랭이 또는 막재말랭이라는 언덕에서 정월보름에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마을 서쪽 흥해안들 방향에 일제시대에 조성한 4000여 평의 아랫 못(일명 관답 못)이 있고 그 바로 앞에 구갈밭(蘆 田坪)이라는 들이 있다. 일제시대에 개간한 들이다. 주변에 배밭이 많다.

서원마을

  • 3리로 임란창의공신 정삼농(鄭三農)이 서원을 창건하였던 마을이다. 지금은 5호가 살고 있으며 곡강 최씨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서쪽 산록(사모산, 鰲山) 개머리 끝에는 곡강최씨 시조 곡강 부 원군 최호(崔湖)의 묘가 있다. 이 마을 북쪽 곡강 어귀에 있던 분뇨종말처리장은 북미질부성 동남쪽 산밑으로 옮겨갔다. 3리로 사모산(鰲山)과 남대실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무심골이라 하는데, 사모산 동북 산자락의 곡강 양수장 바로 옆 자연석에 충비순량비(忠婢順良碑)가 있다. 이 비(碑) 바로 앞 곡 강천 건너편 북미질부산성 벼랑의 두 개의 바위 사이(간격 30㎝,깊이5m)에 상반신만 있는 3기의 부처가 있다.

남대실(南大洞)

  • 3리로 남송리의 중심 마을이다. 터주는 월성이씨다. 동제사는 섣달에 택일하여 지내고 있다. 1960년대에 마을 뒤 야산 규조토 속에 다량의 고래 척추뼈가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사모관대(紗帽 冠帶)를 한 모습의 사모산이 있고, 산남의진 참모장 정순기(鄭純基)의 묘가 있다. 1963년 9월 1일자로 개교하여 졸업생 810명을 배출한 흥해초등학교 남송분교는 1994년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용곡리(龍谷里)

1914년 용연(龍淵)과 이곡(耳谷)을 합하여 용곡(龍谷)이라 하고 곡강면에 속했었다.

이곡(耳谷)

  • 마을의 모습이 귀와 같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뒤 산록에 마을이 있었다. 귀일이라고도 부른다. 터주 인동장씨 재실 인예정(印裔亭)과 월성김씨 재사 용담정(龍潭亭)이 있다.

새터(新基)

  • 북천가에 용연(龍淵)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수해로 폐허가 되고 이주하여 새로 일군 마을이다. 호리 못 둑 아래에 정교보 유공비가 있다.

약성리(藥城里)

1914년 약전(藥田), 북성(北城), 중흥(中興), 북문(北門)을 합하여 약성(藥城)이라 하였다. 1987년 이후 아파트가 다수 건립되면서 근래에는 1,100여 호 규모의 동네로 발전해 있다. 경상북도립영일공공도서관, 흥해초등학교, 향가심인당(진각종,1954), 소명교회가 있다.

약전(藥田)

  • 흥해군 당시까지 있었던 약초를 재배하던 밭에 연유한 마을명으로 약성리의 중심마을이었다.

북문밖 · 북성리(北城里)

  • 흥해성(城)의 북문 밖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흥해초등학교 남동쪽 마을로 종전 청하, 영덕 방면 국도가 있는 길목에 위치한다.

중리(上中里) · 중흥리(中興里)

  • 약전리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 중리·중흥리라 불렀고, 그 위 북서쪽 200m 지점의 과수원 지대 있던 마을을 상·중리 중간에 있었던 연당터도 메워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학성리(學城里)

옛 흥해읍성의 북문 밖에서 그 동북쪽으로 형성된 마을로 동부면 지역의 학성(學城), 곡성(曲城), 북흥(北興), 북원(北園)을 합하여 1914년 학성(學城)이라 하였다. 변화가 별로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학성(學城)

  • 예로부터 이 마을에 글방이 많아서 학성(學城)이라 불렀다 한다. 한편으로는 읍성의 형태가 학(鶴)의 날개 같다 하여 학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옹성리 · 곡성리(曲城里)

  • 성벽의 선이 굽이진 곳에 망대(望臺)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옹기 같다하여 옹성(甕城), 또는 굽진 곳에 있다 하여 곡성(曲城)이라 하고, 그 주위 성 밖에 형성된 마을을 옹성리, 곡성리라 불렀다 한다. 중성리와 경계지점에 흥해중앙교회가 있다.

새마치 · 새만리 · 뒷내

  • 학성 북동쪽 100여 미터 떨어진 지대로서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작은 내를 이루어 여름이면 인근주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몸을 씻기 위해 모여들던 곳이다.

중성리(中城里)

흥해읍성의 동쪽에 위치하며 1914년 중리(中里), 야성(野城), 광성(廣城), 이화리(梨花里)를 합하여 중리의 '中'자와 야성의 '城'자를 따서 중성(中城)이라 하였다. 중리(中里) 1리로 읍성 밖 동편 마을들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중리라 하였다.

광세이(野城 · 廣城)

  • 2리로 망창산(41m)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앞들에 넓은 성지(남미질부성)가 있다 하여 야성 혹은 광성이라 불렀다 한다.

배꼬지(梨花里)

  • 2리로 동쪽에 위치하며 옛날 배가 드나들던 곶(串)이어서 불린 지명이다. 또한 조선조 현종 때 중신 민유중 (閔維重)이 유배를 당하여 이곳에 살면서 배나무를 재배하였으므로 이화평(梨花坪)이라 부른 것이 이화리(梨花里)로 되었다고도 한다. 8.15해방 이후부터 큰 마을로 변천하여 '해방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동대학 방향 도로 왼쪽에 있는 약물둠벙은 주변 미나리꽝과 노의 수원지 역할을 해왔다

망천리(望泉里)

1914년 망창(望昌), 동부(東部), 벌천(伐泉)과 동하면(東下面)의 서원동(書院洞) 일부를 병합하여 망천(望泉)이라 하였다.

망창(望昌) · 역촌(驛村)

  • 조선시대에 역(驛)이 망창산 남쪽 기슭에 있었고 포항으로 연결되는 감투재로 가는 길이 이 마을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망천과 구별하여 원망천(元望泉), 원망창(元望昌)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쪽 망창들 너머 갈밭에 역원용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었다 하며 동제사는 20년 전에 폐지하였다. 망창 산방 구메기에 있던 반공애국자위령비는 현재 읍사무소 뒤에 있다. 남천방변의 자라모양 둔덕을 오무(鰲舞)라 하고, 그 앞들에 비(碑)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여 '비'이라 부른다. 흥해 리라유치원이 있다.

벌샘이(伐泉·羅泉)

  • 마을회관 옆에 물이 솟아나는 큰 샘이 있어 벌샘이라 하였다. 한때 동부면사무소가 있었다. 500여 년 전 영일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벌샘이 북쪽에 400여 년생 회화나무가 한그루 남아 있고 그 앞에 화짓 대배기란 터가 있는데 영일정씨 성검(晟儉)이란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그 집에 화짓대(솟대)를 세웠던 곳이라 전하며, 그 북쪽 옛 서당 부근에 윤리학당(倫理學堂)이 있었다. 벌샘이 옆에 울림석(蔚林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길을 낼 때 묻어버렸다고 한다. 벌샘이 곁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내왔으나 3년전에 폐지하였다.

양백리(兩白里)

1914년 내백(內白)과 외백(外白)을 합하여 양백(兩白)이라 하였다. 한때 북상면 사무소가 있었으며, 마을 서편의 성지곡 (聖旨谷. 일명 鶴谷) 일대에 학의 대서식처가 있어 산이 희게 보였기에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전한다.

외백(外白)

  • 1리로 인천채씨(仁川蔡氏) 집성촌이다. 1966년 3월 1일에 개교하여 졸업생 206명을 배출한 곡강초등학교 양백분교장이 1990년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양백교회와 채씨 재실 영모정(永慕亭)이 있다. 뒷산 2㎞쯤 오르면 고려말 배천희(裵千熙) 국사의 묘와 말(혹은 禦侮校尉) 무덤이 가리점[葛点]에 있다.

내백(內白)

  • 2리로 여강이씨와 오천정씨 집성촌이었다. 여강이씨 재실 해강정(海崗亭)이 있다. 동제사는 마을 앞 백산제 (白山堤)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지낸다.

용전리(龍田里)

1914년 신성동(新成洞)과 용전(龍田), 임천(林泉)의 일부를 합하여 용전리(龍田里)라 하고 각각 1, 2리로 나누었다.

신성동(新成洞)

  • 원래 이 마을 북서쪽에 있던 안삼바리(三海)라는 어촌이 없어지고 이곳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자 신성동 (新成洞)혹은 삼바리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용전(龍田)

  • 마을 뒤에 용두(龍頭)들이 있는데, 이 지역에 누워 있던 큰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곡강의 하구를 치니 그 때까지 호수였던 이 지역의 물이 빠져서 육지가 되었다는 전설에 의해 용전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용두들 끝에 있는 동제당에서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내오다가 13년 전부터 폐지하였다. 도로변에 곡강최씨 재실인 용전재(龍田齋)가 있다.

임천(林川)

  • 용전과 합하여 2리에 속한다. 노씨와 금씨가 마을을 일구었다고도 전하며, 옛 길을 기준으로 용전과 용천으로 분리된 상태다. 곡강지서와 곡강면 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덕성리(德城里)

1914년 덕곡(德谷)과 장성(長城)을 병합하여 덕성(德城)이라 하였다. 장성 마을 입구 덕성사(德城寺) 앞 건너편에 있는 수뢰탕은 신경통과 땀띠 같은 피부병에 탁월한 효험이 있었다 한다.

덕실(德谷)

  • 1리로 흥해읍의 최북서단에 위치하며 월성이씨 집성촌이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덕실(德室· 德實)이라 불렀다 한다.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올린다. 골안못이 있으며, 남쪽에 일제시대에 막은 공리 못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 마을 월성이씨 입향조를 추모하는 재실 이상재(履想齋)가 있다.

장성(長城)

  • 2리로 원래는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 불노동(不老洞), 장생(長生)골이라 하여 흔히 장생이라 불렀는데 어떤 흥해 군수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의 고명(高名)과 같다 하여 장성(長城)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한다. 신라대에 축조한 장생지(長生池) 안 터에 형성된 마을로서 하천 북쪽을 안 마을, 건너편 성좌산(聖座山) 기슭에 밤나무가 많던 지역 마을을 율리(栗里)라 부른다. 율리에는 학성이씨 재실 태엄정(泰嚴亭)이 있다. 예로부터 동제사가 없는 마을이다. 장생지의 못둑 흔적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마을 입구에 비학산 덕성사 (1994년)라는 절이 있다.

안동네

  • 못 안 마을로서 동초산(董草山) 기슭 양지바른 곳에 학성이씨가 집성세거하고 있다. 이씨 재실 덕봉재(德峯齋)가 있으며, 화왕산(火旺山) 전투 때 창의종군하였던 이봉수, 이열 의사의 출신지이다.

덕장리(德壯里)

1914년 덕산(德山), 원두들, 장자(壯者)를 병합하여 덕장(德壯)이라 했다.

웃장사

  • 옛 마을은 현재의 마을 뒷산 장자봉(壯者峯) 기슭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려 이전부터 백만장자가 살았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아랫장자마을 북단에 장사가 나는 샘이 있어 장사(壯士) 마을이라 한 것이 장자동(壯者洞)으로 굳어졌다고도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밑둘레 2.6m, 수고 8m 반송 (盤松) 정자목이 있다. 남서쪽에는 작은 못이 둘 있는데 남쪽 것은 헌못, 그 북편 것은 새못이라 하며 부근에 피부병이나 위장병에 효험이 높은 약수터가 있다. 7번 국도변에 전몰대한반공청년망 향비와 훈련중 헬기사고로 죽은 미군위령비가 있다.

아랫장자

  • 7번국도가 이 마을 동편 진(陳)두들을 통과하고 있으며, 신라대에 부호가 살던 웃장자 마을에서 전라도 모처에서 구하여온 긴 뿔 나팔을 못가의 누각에서 불어 시간을 알리게 하여, 못 이름을 둔각지(頓角池)라 했다 한다. 경주김씨가 터주다. 옛날부터 동제가 없었다. 옛 별래재에는 일제치하에 철도부설을 하기 위해 뚫은 터널이 남아 있다.

못밑 · 덕산(德山)

  • 못이 있는 장성마을의 아래에 있다고 못밑이라 한다. 주위 산들이 바람을 막아 마을에 덕을 준다 하여 일명 덕산(德山)이라고도 부른다. 정월보름날 2년에 한 번씩 동제사를 지낸다. 원두들에 조선조때 역원(驛院)이 있었다 한다.

용천리(龍泉里)

1914년 용소(龍沼), 임천(林泉), 굴산(屈山), 신땀(新潭), 벌재(伐堤) 등을 통틀어 용천(龍泉)이라 하였다.

굴산(屈山)

  • 1리로 강물(北川)이 마을 앞에서 굽이쳐 흘렀기에 굴산이라 불렀다 한다. 용주사(龍珠寺)란 작은 암자가 있다.

임천(林泉)

  • 1리로 마을 동편에 숲이 있었는데 그 속에 샘이 있어 임천이라 하였다 한다. 노씨와 금씨가 일군 마을이라 한다. 용전리의 임천과 용천리의 임천으로 분리되어 있다. 용천교회와 곡강제일교회가 있다. 곡강초등학교 앞에 있던 영일지방사방준공탑은 1994년경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철거되어 오도(烏島)로 축소 변형 이건되었다.

용슬(龍膝 · 龍沼)

  • 2리로 옛날에 마을 앞으로 소하천이 흐르면서 소(沼)를 형성했는데 그 모습이 용을 닮은 데다 용이 승천 했다는 전설이 있어서 용소라 했으며, 마을의 위치나 형태가 용의 무릎에 해당된다 하여 용슬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용소 터 남쪽에 있는 300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를 딴봉이라 부른다. 이안에 있는 제당에서 2년마다 신땀마을과 합동으로 동제사를 지냈으나 5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신땀(新潭)

  • 2리로 용소마을 북동쪽에 있고, 맑은 물웅덩이를 개발한 데 연유한 지명이라 한다. 오천정씨 묘역에 벼락 바위가 있다.

방근(芳近)

  • 2리로 멀리 개천이 보인다고 망계(望溪)라 했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방근(芳近)으로 개칭했다 한다. 정월에 택일하여 동제를 지낸다.

별재(伐齋)

  • 2리로 별래재 남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옛길로 가는 산록에 많은 공장들이 서있다. 고갯마루에는 큰 서낭당이 있다.

금장리(金壯里)

1914년 금사(金沙), 선돌배기, 장동(壯洞), 바래미, 방근(芳近), 실안 등을 합하여 금장(金壯)이라 하고 곡강면에 속하였다.

금사(金沙)

  • 1리의 중심 마을로 옛날 마을 뒷산에서 사금이 나온다 하여 금사동 혹은 금사방이라 불렀다. 서당 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이 치소포란형(雉巢抱卵形)에 해당하여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영천이씨 재실인 사재정(沙齋亭)이 있다. 잠자골 산 정상에 아구할망 바위가 있다.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선돌배기(立石) · 새탑

  • 11리로 일곱 개의 고인돌이 있던 곳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장동(壯洞)

  • 1리로 수곡(壽谷)산 아래 골짜기에 위치하며 봉화금씨만 6호 세거하고 있다. 정월보름에 남쪽 바래미의 협동으로 동제사를 지낸다.

바래미

  • 1리로 지형이 바릿대 같다 하여 발산(鉢山), 혹은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바래미라 불렀다 한다.

방근(芳近)

  • 2리로 멀리 개천이 보인다고 망계(望溪)라 했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방근(芳近)으로 개칭했다 한다. 정월에 택일하여 동제를 지낸다.

실안

  • 2리로 곤륜산 서편으로 못이 메워진 자리에 형성된 마을이다.

흥안리(興安里)

1914년 연당뜸을 병합하여 흥안이라 하였다.

큰뜸

  • 1리로 길에서 마주하여 남쪽에 북하면 사무소(후에 곡강면 사무소로 있다가 임천으로 옮겨 갔음)가 있었고, 장터(현재 주택지)가 남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길 북쪽에 곡강지서가 있었다. 정월 초육일 원당산목에는 금줄을 치고,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곤륜산밑

  • 1리로 곤륜산 남쪽 기슭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연당뜸

  • 2리로 현 마을회관 자리에 연당이 있었다. 정월에 택일하여 동제를 지낸다. 북미칠부성지가 있는 앞산에 낚시봉과 문고개가 있다. 오천정씨 문중의 곡강재실이 있고, 연당 서편 100여m 지점에 낚시봉의 추에 해당 하는 입석(立石)이 있다.

곡강리(曲江里)

1914년 봉림이, 동골, 너구(汝口), 흥곡(興谷), 곡강, 봉림이불 등 자연부락을 합하여 곡강(曲江)이라 하였다.

봉림이(鳳林)

  • 1리로 뒷산의 지세가 봉(鳳)의 형국으로 봉이 대밭에서 먹이를 얻는지라 봉림(鳳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짓달 초하룻날 동제를 지낸다. 마을 서쪽 구도로 입구의 형세가 부채처럼 생겨서 선지(扇紙)고개라 한다. 마을입구에 있는 팽나무(300여 년생)의 잎 돋는 모습을 보고 그해 농사를 가늠했다 한다. 경주 최씨와 진주하씨의 집성촌이다. 1765년 발간된 영일 읍지에 이 마을 앞 큰들을 봉림호(鳳林湖)라 기록하고 있다. 들 중간도로 (봉림-너구)의 남쪽을 배달이들, 도로 북쪽을 갯들이라 한다.

동골(東谷)

  • 2리에 속하며 넓은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너구(汝口)의 동쪽 골이란 뜻이며, 이 지역은 물론 용한(龍汗)-우목리(牛目里)에 이르는 해안 촌락의 터주가 대부분 여씨(汝氏)라 한다.

너구(汝口)

  • 2리로 너구 남쪽 언덕비탈에 위치한다. 이 골에 들어와서 살면 흥(興)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마을 남서쪽 언덕 위의 제당(당산목 200년생 소나무)에서 동짓달 초나흗날에 동제를 지낸다. 1969년 준공된 천마지(답다리 못) 남쪽에 대각사(구 용화사)가 있다. 이 답다리골 어귀에는 두부(頭部)가 파손된 미륵석불(높이 1.8mm 연좌대 직경 2m)이 남아 있다. 천마지 앞들은 옛날 봉림호수였을 때 배를 매달아 두던 곳이라 배다리들이라고 부른다. 말을 닮은 천마산(天馬山)은 말머리·말잔등· 말꼬리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말목 부분이 잘린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옛날 남송리 무심골에 살던 한 장수가 천마가 화살보다 느리다고 목을 내리쳤는데, 그 순간 말이 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흥곡(興谷)

  • 2리에 속하며 넓은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너구(汝口)의 동쪽 골이란 뜻이며, 이 지역은 물론 용한(龍汗)-우목리(牛目里)에 이르는 해안 촌락의 터주가 대부분 여씨(汝氏)라 한다.

곡강(曲江)

  • 3리로 신라시대에 병마를 방목사육했던 지역으로 나부산(放牧山)이라 부르는 야산이 곡강천을 경계로 곤륜산(崑崙山.177m. 일명 高靈山)과 마주하고 있다. 산의 북동쪽 기슭에 세 돔으로 나누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웃각단은 나부산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남쪽 제당에서 동짓달 초나흗날 제사를 지낸다. 마을 뒤쪽에 해주오씨 재실이 있다.

봉림이불마을

  • 3리로 영일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20년 전까지 동제사를 정월보름날 지내다가 폐지했다. 이 지역 해안선을 따라 봉림수(鳳林藪)가 있었다. 효종 때 최군수가 모두 베어 샛바람이 극심하자 방목하던 말을 구룡포의 북목(北牧)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주변 송림 속에 모래밭을 일구어 만든 시금치 단지가 있다.

죽천리(竹川里)

1914년 봉화산(烽火山)의 동남 기슭 해안의 어촌 지을(知乙)과 대벌이를 합하여 죽천(竹川)이라 하였다.

지을(知乙)

  • 1리로 옛날에 숲과 물이 좋아 새들이 알고 많이 서식하였기에 불리어진 지명이라 한다. 동짓달 초사흗날 동제사를 지내고 이어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흥해 침례교회, 죽천교회가 있다.

대벌이(竹川里)

  • 2리로 이대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여남천(汝南川)의 하구에 형성된 어촌이다. 대나무가 많은 벌에 있다고 대벌이라 부른다. 동짓달 초이튿날에 동제사를 지낸다. 1988년 포항1대학(구 포항실업전문대학)이 포항시 송도동에서 이곳으로 이건되었다. 대학의 서편 절골에는 1986년 일붕선교종(一鵬 禪敎宗)에서 설립한 세심선원(洗心禪院)과 인동장씨 재실이 있다.

우목리(牛目里)

1914년 왜골과 우목(牛目)을 합하여 우목리(牛目里)라 하였다. 우목은 누워있는 소의 눈 위치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라 한다. 또한 우목구미(牛目龜尾)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마을뒷산의 형세가 거북 모양이고 그 꼬리 부분에 동네가 자리 잡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월 삼짇날과 동짓달 초사흗날에 동제사를 지낸다.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왜골(왜목)은 왜구 감시 초소가 있어 불린 마을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동네 뒤편의 봉화산(烽火山)에서 추석 이튿날(음력 8월 16일)에 연안 5개동 주민들이 모여 그네타기와 농악놀이 등의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죽전초등학교, 우체국, 보건진료소, 전신전화국등의 공공기관이 있어 해안 여러 마을의 중심이 되고 있다. 초등학교 교정에 향토개발선구자유공비, 죽천방면 우측 산에 해병제일상륙사단 자매결연비(1996), 제당 어귀의 향토개발유공기념비, 마을 북동 해변 언덕 위에 조선일민무호박공도해비(朝鮮 逸民無號朴公跳海碑)가 있다.

용한리(龍汗里)

1914년 용덕(龍德)과 소한(小汗)을 합하여 용한리(龍汗里)라 하고 각각 1, 2리로 구분하였다.

용덕(龍德)

  • 마을의 지형이 큰 용이 엎드려 있는 것 같으며 용의 덕(德)을 입어 살아가는 곳이라고 용덕(龍德)이라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마을의 지형이 용두(龍頭)에 해당하며 용이 화를 내어 포효(咆哮)하는 형국이라 용이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라는 뜻으로 용덕이라 불렀다 한다. 용의 입안에 해당하는 곳에 제당이 있어 삼월삼짇날과 동짓달 초사흗날 동제사를 지내고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흥일교회(1975. 4. 7 건립)가 있다. 15년 전까지는 이 마을에서 봉림이불까지 곳곳에 해당화 군락지가 있었다.

소한(小汗)

  • 2리로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작은 내에 땀을 씻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든다 하여 소한리라 한다. 오천장씨가 마을 터전을 잡았다. 동제사는 8월 보름과 동짓달 초이렛날에 지내며,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마을 뒤쪽 오천정씨 재실이 있는 문중산인 큰산(大山)은 소(牛)를 닮았다 하여 우혈(牛穴)이라 불린다.

칠포리(七浦里)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이며, 고종 8년(1870) 동래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군사 요새로서, 7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 하여 칠포성(七砲城)이라 불렀다 한다. 칠포(漆浦)라고도 부르는데 절골에 옻나무가 많아서, 또는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한 듯 검은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1914년 북하면 지역의 강서, 강북 두 마을을 합하여 칠포(七浦)라 하였다.

강북(江北)

  • 망작산(望齊山) 산록과 강변에 걸쳐 조선 중종 5년(1510)에 쌓은 칠포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망제산에는 불제당과 동제당이 각각 있어 3월 보름날 동제사를 지내고, 5년마다 별산굿을 한다. 1956년 11월 11일 개교하여 졸업생 2,073명을 배출한 칠포초등학교는 1996년 3월 1일에 폐교되었으며 그 건물은 현재 청소년 수련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골짜기에 1940년에 건립한 대원사(大圓寺)가 있고 그 뜰에 평화통일기원일붕시비가 있다. 오봉산(烏熢山) 꼭대기에는 석축을 했던 흔적이 높이 4m, 지름 20m정도 남아 있다. 지금은 이 주위가 마을 공동묘지로 되어 있어 공동묘지산이라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심한 가뭄이 들면 공동묘지산과 곤륜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강서(江西)마을

  • 고현천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불리어진 지명이다. 상두들(上野)에는 큰 주춧돌과 성혈식 고인돌 10여기가 있다. 현재 마을은 섬산(島山)의 동쪽 '잠불' 일원에 형성된 어촌으로 3월 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상두들 뒷산 농밭산에서는 조개화석이 발견되기도 한다. 마을 남쪽에 있는 곤륜산(崑崙山 ;176m, 일명 高靈山)의 서편 산기슭 바위벽에 다수의 선사시대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오도리(烏島里)

1914년 한가심이, 검댕이, 섬목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오도(烏島)라 칭하고 곡강면에 속하였다. 오도(烏島)는 원래 부둣가에서 100m 거리에 위치하며 3개의 커다랗고 질펀한 검정색 바위로 되어 있는 작은 섬인데,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가심이 · 황계(黃溪) · 방어(方魚)

  • 큰 나루터가 있다 하여 한가심이, 개천이 누렇다 하여 황계(黃溪), 방어가 많이 잡힌다 하여 방어(方魚)라 불리었다. 9월 중순 강릉유씨(江陵劉氏) 터주와 오천정씨, 월성최씨 골목 신위를 모시고 동제사를 지낸다. 해발 145m의 묵은 봉(舊烽山) 기슭 해변에 위치한다. 언덕 위에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일지역녹화사업 순시기념비(1977년 건립)와 영일지역사방 준공기념비(1978년 건립)가 있다.

검댕이(檢丹)

  • 청하면 신흥리로 가는 길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이 있어 금단(禁斷)의 절이 있다는 뜻의 지명이 변천하여 검단(檢丹)이라 했다 한다.

섬목(島項)

  • 1리로 길목마을이어서 섬목이라 했다 한다. 구월중구에 동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