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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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읍 지명유래

풍기읍 지명유래
리별 유래
성내1리
  • 옛 풍기군 동부면 성내리였는데 성(城)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내리라 하였다.
  • 현재 풍기읍사무소, 풍기초등학교, 풍기우체국, 풍기지구대, 농협중앙회 풍기지점 등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성내2리
  • 옛 풍기군 당시 이곳에는 죄수(罪囚)들을 가두어 두는 옥사(獄舍)가 있어 옥대가리(獄垈街里) 옥대거리라 하였다.
  • 1975년 이 마을에서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안길을 확장하다가 당간장식 용두가 출토되었습니다.
성내3리
  • 옛 풍기군 당시 이곳에는 죄수(罪囚)들을 가두어 두는 옥사(獄舍)가 있어 옥대가리(獄垈街里) 옥대거리라 하였다.
성내4리
  • 옛 풍기군의 역대 수령(郡守)들의 선정비를 비롯하여 많은 비석들이 거리를 메웠다 하여 비집(碑集)거리, 비치(碑置)거리라 하였으며, 이 마을 서쪽에 옛 풍기 성 (城)의 서문(西門)이 이곳에 세워져 있어 이 거리를 서문거리, 서문박 거리라 부 르고, 금계리 마을에서 흐르는 냇물에 다리를 놓아 그 다리를 유다리라 했으며, 현재 풍기소방서 옆 부지에 다리를 복원하였습니다.
동부1리
  • 옛 풍기군의 동부면 동문리로 지역이 가장 넓고 큰 마을로 풍기성(豊基城)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문리라 하였다.
  • 1941년 왜정(倭政)때 풍기군이 영주군에 편입되면서 영주군 풍기읍 동부동으로 개칭 되고 구역을 분활하여 동부6리까지 되어 있다.
동부2리
  • 옛 풍기군의 동부면 동문리로 지역이 가장 넓고 큰 마을로 풍기기성(豊基城) 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문리라 하였다.
  • 1941년 왜정(倭政)때 풍기군이 영주군에 편입되면서 영주군 풍기읍 동부동 으로 개칭되고 구역을 분활하여 동부6리까지 되어 있다.
동부3리
  • 이 마을은 새마, 새마을(新村)로 구름밭 본 마을 북쪽으로 경계하고 있다.
  •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구름밭(雲田)마을구역으로 이 지역은 전부가 자갈밭이 었는데, 1930년경에 이 자갈밭을 개척(開拓)하여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 하여 마을 이름을 새마을로 불렀다.
동부4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로 속칭 구름밭(雲田)마을이라 한다.
  • 구름밭의 유래는 동문밖에서 이 마을까지가 풍기장터(市場)였던 것으로 풍기장 날이면 여러곳에서 장꾼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하여 구름밭이라 하였고 또 풍수 설(風水說)에 의하면 이 들 어느 곳에 운중선좌(雲中仙坐)의 명당(明堂) 자리가 있 어 구름밭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동부5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였으나 속칭 토성리(土城里) 옛 풍기성(豊基城)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성리(東城里)가 잘못 전해져 토성리로 되었다는 설(說) 과, 마을 뒤 덕아산 모양이 토성처럼 생겼다 해서 토성리라고 부른다는 두가지의 설(說)이 있는 마을이다.
동부6리
  • 이 마을은 본래 동부2리 구역으로 풍기읍이 발전됨에 따라 마을의 인구가 날로 증가되어 동무수행(洞務遂行)에 어려움이 많아 1970년네 분동(分洞)되어 동 부6리로 갈리어 나왔다.
  • 풍기 미곡시장(米穀市場리)이 이 마을 구역으로 장날이면 순흥방면이나 단양, 영 춘, 하일, 한듬 방면에서 생산된 곡물(穀物)들이 모여들어 성시(盛市)를 이루어 인근에 널리 아려져 왔다.
산법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산법리(山法里)로 속칭 산의실(山意室), 산내실(山內室), 산내곡(山內谷) 산법리라고 불려져 왔다.
  • 마을 북쪽으로 노인봉(老人峰)을 비롯하여 옥녀봉, 동자봉, 산맥과 서쪽 으로 점방(点方)재에서 토성(土城) 마을 앞까지 쭉 뻗어내린 진등(鎭登)이 동서 (東西)로 막혀 있어 내부구릉(丘陵)지대라는 뜻에서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미곡리
  • 이 마을은 옛 부터 미곡리(味谷里)로 되어 있다. 위치는 풍기에서 순흥 으로 들어가는 도로 서쪽에 들어가 있어 도로(道路)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며, 풍기읍 산법리와 순흥면 태장리, 안정면 단촌리와 대평리를 접계하고 있다.
  • 이 마을은 안마, 웃마을, 안맥기실, 바깥 맥기실, 목기실(木器室), 모계실 (牧鷄室), 미곡리라 한다. 고려말(高麗末)에 나라에 고관대작(高官大爵) 으로 있던 신하들이 이 마을에 와서 피난을 하던 중 산적(山賊)들의 습격을 많이 받아 폐동(廢洞)이 되었다가 약 250년 전부터 다시 이 마을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삼가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욱금리였는데, 왜정(倭政)때 행정구역 개폐로 삼가동(三街洞)으로 분리되었다.
  • 이 마을을 삼거리라 이름한 유래는 소백산 비로봉을 중심으로 세갈래 골짜기로 되어 있고, 골짜기 마다 마을이 산재해 있어 삼거리라 이름했다고 한다.
욱금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당시 장선리를 경계로 소백산 밑까지 전부가 서부면 욱금리로 되어 있어 큰 마을로, 마을의 형태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양지쪽 본 마 을과 음지쪽 영전 마을이 분리되어 있는데 본 마을을 우금, 웃금, 욱금리라 하는데, 유래는 이 마을에 욱양서원(郁陽書院)이 있어 그 서원의 이름을 따서 욱금리라고 하며 음지 마을에는 영전사(靈田寺)가 있어 절의 이름을 따서 영 전말, 영전, 영전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금계1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이다. 풍기향교(豊基鄕校)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創建) 되었다가 1735년에 교촌리 현 위치로 이건(移建)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구교리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 1914년 행정구역개폐로 영주군 풍기면 금계1구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산재해 있는 마을로 임실 안마, 부계발 밭마 쇠바리, 잿밭, 용천동, 공원밑이 행정구역 으로는 모두 금계1리로 되어 있어 풍기읍에서 큰 마을로 평을 받고 있다.
금계2리
  • 이 마을은 속칭 장생이, 장시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불리어 왔다. 그 유래는 마을 지형이 긴 배(船) 모양 같다 하여 장선이라고 이름하였다. 하고, 또 일설은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마음씨 좋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長善)으로 불렀다 한다.
  • 이 마을에는 금선정과 욱양서원이 소재하고 있다.
교촌1리
  • 이 마을에는 정림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 이름을 따서 정림촌이라 불리기도했 다. 1542년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 그 이듬해에 풍기향교가 금 계1리 임실마을 서쪽에 있었는데 이 마을 정림사 절터로 옮기고 나서 풍기군 서부면 신교리로 되어 속칭 향교마, 향교말, 향교마을, 신교리라고 불리어 오다가 왜정때 행정구역개폐로 영주군 풍기면 교촌1구로 개칭되었다.
교촌2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등구리이다. 속칭(俗稱) 둥두들, 등드들, 등고, 등구리라 불리어왔다. 그 유래는 마을을 들어가려면 언덕을 올라 들어 감으로 등구라 하였을 것이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에 개폐로 교촌 2구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백1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白也里)였으며, 속칭 희야골이라 불리어 오고 있 다. 마을뒤에 호랑이와 모양이 흡사한 두 개의 바위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동호암, 서호암이라 하고, 이 한쌍의 백호가 서동, 부서(婿東, 婦 西)의 형상(形 象)으로 위치하여 혼례식을 올렸다는 전설에 따라 백호의 백자를 따서 백야리라 하여는데 지금은 이 바위들이 없어졌다. 1914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편입과 동시 가운데 야자를 버리고 영주군 풍기면 백동1구로 개칭되었다.
백2리
  • 이 마을은 속칭 미안, 뫼안, 모내(暮內), 산내라고 불렀는데, 좌우로 산이 둘러 쌓였다 해서 이름한 것으로 희여골 마을 남쪽 산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들을 미안들이라 하고 1934년에 죽령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5번국도가 개통 되었 으며 도로변에 도 민가 몇 채가 있었다. 속계, 속포는 미안마을 남쪽 냇물 건너에 위치하고 있으며, 냇가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빨래하기 좋은 냇가 마을이란 뜻에서 속계 또는 속포라고 부르게 되었 다고 한다.
백신1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 구역이었는데 1910년 무렵 안동권씨 안동김씨 홍해 배씨 삼성(三姓)이 이곳에 정착하여 새터전을 개척하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샛터말, 샛터, 신기동이라 불렀고 4년후 행정구역 개폐로 백야리의 백자 와 신기동의 신자를 따서 백신동 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신2리
  • 이 마을은 옛 군당시 서부면 백야리 구역으로 웃마을, 아랫마을 바깥마을로 산재해 있는 마을로서 속칭 웃마을을 흰물내기, 백수동(白水洞)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 뒷산에 넓은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덮쳐 흐르는 물이 몹시도 희개 보인다는데서 유래되는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앞에 수령이 약 90여년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수호목으로 숱한 애 환을 겪으면서 지금 까지 마을을 수호(守護)하고 있다. 우우실, 우이실은 백신2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지형이 흡사 큰황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우이실이라 불렀 다고 한다.
서부1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북문리였는데, 옛 풍기성을 사방으로 쌓아 놓고 동서남 북으로 4대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성북문 밖에 자리한 마을임으로 북문리 라 하였다.1914년 왜정때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편입되어 영주군 풍기면 서부1구로 개칭 되었다. 이 북문은 순흥방면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당시는 이 북문이 풍기 4대문 중 가장 출입이 많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서부2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북문리로 풍기성 너머 위치해 있다하여 성둑넘 마을이라고 해 으며 마을 서쪽 지역은 서문밖이라고도 불렀다. 서부1리와는 도로를 접계하고 성내1 리와는 옛 풍기성 북쪽둑을 접계하였는데 성북문 바로 서쪽에 크고 넓은 반석이 있 어 그 곳을 너븐들거리, 넓은 돌거리라고 불리어왔다.
서부3리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노고촌리(老古村里)라고 하였으며 웃마을, 아랫마을, 한 림촌(翰林村)으로 불리어 왔다. 한림촌은 본마을 동쪽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 는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에 인명미상의 한림학사 세사람이 태어났다 해서 한림촌 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창락1리
  • 이 마을은 옛 순흥부(順興府) 창락면 관촌리(館村里)로 영남북부에서 가장 큰 역 (驛)이 이 마을에 자리하고 있어 창락면 관촌리라 하였다.
  • 창락면은 본 마을인 관촌리, 수철교리, 죽령촌리, 전고리 등 4개 마을을 관할(管轄) 하였다.
창락2리
  • 이 마을을 속칭 곰수골, 웅수동(熊水洞)이라고 했는데 산세가 곰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하는 설과 산세가 너무 험준해서 곰이 많이 살았다고 곰수골이라 했다 는 설도 있다. 또 이 마을을 대사동(大寺洞)이라 함은 마을 북쪽에 큰 사찰인 유석사 (留石寺)가 있으므로, 이름을 대사동 이라고 한다는 설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절터를 찾아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대사동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수철리
  • 이 마을은 옛 순흥도호부 창락면 수철교리(水鐵橋里)이다. 속칭 무쇠다리, 수철교리, 수철, 수철리, 이 마을 앞에 무쇠다리가 있어 이름한 것이다.
  • 이 무쇠다리라는 신라(新羅)때 계림부(鷄林府)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그의 딸을 구해 준 두운스님을 위하여 희방사(喜方寺)를 지어주고, 그 삼문밖 시내에 무쇠로 다리를 놓아 주어 두운 스님의 은혜를 보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전구1리
  • 이 마을은 옛 군당시 와룡동면(臥龍洞面) 전구리였는데 왜정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폐 로 풍기군이 격하되어 영주군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풍기면 전구동으로 개칭되었다.
전구2리
  • 이 마을은 옛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창락면 전고리(前皐里)였는데 왜정때인 1914년 행정구역개폐로 순흥도호부가 격하(格下)되고 영주군으로 편입과 동시 풍기면 전구2 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도솔봉 바로 밑 첫 마을로 뒷산 봉우리에 옥녀라는 선녀가 내려와 바위 위에서 베를 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베틀 바위라 이름하고, 그 산봉우리 를 옥녀봉이라 하고, 이 옥녀봉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으로 마을 이름을 옥동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산면 지명유래

이산면 지명유래
리별 유래
원리
  • 돗밤실(栗谷) : 이조세종때 안동 권씨가 이주하였으며 당시 밤나무가 많고 밤이 많이 생산되었다하여 율곡(栗谷)이라 함
  • 한성골(漢成골) : 漢城左尹을 역임한 鄭道復이 이곳에 와서 살았으므 로 그때 사람들이 동명을 漢成동이라하여 지금에 이름
신암리
  • 삼봉골 : 마을의 지세가 마을을 중심으로 좌,우후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봉이 우뚝솟은 봉우리여서 삼봉골(三奉골)이라 함
  • 우금(友琴) : 1520년경 漢成府愿尹을 역임한 金友益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開拓당시 마을의 지형이 앞산줄기와 뒷산 모형이 거문고를 치는 형상이라하여 칭함
  • 신기(新基) : 李朝時는 未岩面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미륵당. 새마을. 샛터松골을 합하여 칭함
지동리
  • 탑골(塔골) :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玉麗菴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전해지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형적만이 남아 있음
  • 일우실(逸遇室) : 이조중엽 全宅弘이라는분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앞에 개울이 흐른다 하여 이후라고 칭하기고 하며 全奎炳장이 세운 逸遇亭의의 停號 가 洞名되어 칭함
  • 저수골(長水골) : 1580년대 달성 서씨 둔암선생의 후손들이 생활을 避하여 伊溪上葛 田洞에 거주하다가 고을이 협소하여 긴계곡에 평탄한 곳에서 마을을 개척하였다하여 長水洞이라 함
석포리
  • 번개 : 이조선조시 명신 김록선생의 晩年 은거지로서 영주 동쪽에 흐르는 하천을 배경삼아 東浦라고 칭하다가 그 후손 義禁府都使 번개공이 동천(現乃成川)을 돌려 치수함으로써 계(浦)를 돌렸다고 하여 반포라 일컬어지면 또한 선생의 호 번개를 따서 칭함
  • 흑석(黑石) : 동리입구에 검은 바위가 있어 黑石마을이라 함
용상리
  • 배해(背海) : 약1500년경 최임수라는 선비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마을의 지세가 높은 편으로 동에 내성천, 서에 서천이 흘러 동서로 물을 안고 떠있는 배와 같다하여 칭함
  • 어우실(御位室) : 연대는 알수없으나 임금님이 하룻밤을 머무르고 갔다하여 칭함
신천리
  • 내매(乃梅) : 晋州 姜氏 조상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최초로 마을을 개척한 곳으로 梅花落地라하여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가축은 매화꽃처럼 물위에 떠올랐다가 떠내려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음
  • 새해(新海) : 당초 月城 孫氏 선조가 동천면(乃城川) 출천동이라는 동리에 살았으나 수마로 인하여 재를 안고 새해로 이주하였으며 새해라 함은 수마를 피해 높은곳에 자리한 동리인지라 안개가 끼면 마을 아래로 바다와 같이 보이므로 새해라 하며 또, 하나의 전설은 새해가 아니고 沙海라고하는대 동리에서 내성천 을 보면 모래바다를 이룬다하여 칭하지고 함
운문리
  • 귀통골(貴通골) : 옛날 이곳에 산적이 출몰하여 가산을 도적질해 감으로 이를 금지하기 위해 마을의 개울로 귀한손님이 다니면 통과시키지 못하게 한 연유로 貴通골이라 함
  • 돌트미 : 옛날 이곳에는 돌이 많으며 돌사이에 틈이 많다 하여 칭함
두월리
  • 두들 : 이마을은 두메산골이었으나 내성천 연안을 낀 넒은 들이 있어 두들이라 칭함
  • 해맬(湖梅) : 예날에는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개울물이 호수처럼 맑고 깊어 매화가 호수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라하여 호매라 칭함
내림리
  • 바같수구리 : 1600년경 연일 정씨가 윤실일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 마을터가 연화정수라 하여 기와집을 짓거나 펌프를 박으면 화를 입는다는 전설이 있어 새마을 사업이 뒤떨어진다. 수구리라함은 내성천이 이 마을을 감돌아 흐른다하여 연유된 동명이다
  • 안수구리 : 1600년경 반남 박씨 문중에서 박승임 선생의 묘를 이곳에 모시고 그 후손이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내성천이 마을을 감돌아 흐른다하여 수구리라 함

평은면 지명유래

평은면 지명유래
리별 유래
평은리
  • 태종13년(1413) 충주석씨 석여명이 마을 개척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평은리가 됨
  • 자연부락 : 영은
강동1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강동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강동1리가 됨
  • 자연부락 : 금계, 왕유
강동2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강동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강동2리가 됨
  • 자연부락 : 귓골, 강성, 동막, 안동막, 양잠
지곡1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지곡리라 칭함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지곡1리가 됨
  • 자연부락 : 지신동
지곡2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지곡리라 칭함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지곡2리가 됨
  • 자연부락 : 삼밭골, 새장골, 새마을
오운1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오운리라 칭함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오운1리가 됨
  • 자연부락 : 금곡동, 고사동, 평지동, 연당골
오운2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오운리라 칭함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오운2리가 됨
  • 자연부락 : 새터, 예고개, 갈분
천본1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천본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천본1리가 됨
  • 자연부락 : 외뚜들, 멀래, 서부럼
천본2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천상면 천본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천본2리가 됨
  • 자연부락 : 망월, 내매
금광1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진문면 금광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금광1리가 됨
  • 자연부락 : 오가미, 심곡, 새뱅이
금광2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진문면 금광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금광2리가 됨
  • 자연부락 : 금광
금광3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진문면 금광리라 칭함
  • 1980년 토지명칭변경으로 영풍군 평은면 금광2리가 됨
  • 자연부락 : 동호, 무섭들, 가자골
용혈1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진문면 용혈리라 칭함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용혈1리가 됨
  • 자연부락 : 놋점, 미림, 납들고개
용혈2리
  • 태종13년(1413) 영천군 진문면 용혈리라 칭함
  •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용혈2리가 됨
  • 자연부락 : 시낼, 녹동

문수면 지명유래

문수면 지명유래
리별 자연부락 유래
승문1리 막지고개·막현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아늑한 마을로서 마치 막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막현 (幕峴)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부근에는 장군봉(將軍峰)·장막 등의 지명이 있고 난(亂)을 피할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6.25당시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난을 피하기도 한 곳이다.
버드랭이·유릉·유천 전주 류씨(全州 柳氏)가 이 곳에 묘를 쓰게 된데서부터 유천(柳川)이라 불렀다. 한편 류자(柳字)를 따서 버드랭이라고도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점골·점촌 막현(幕峴) 동편 산 모퉁이에 위치한 4,5가구의 소집단 자연 부락이 형성된 후 이 마을에 처음으로 주막이 생기게 되자 점골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한다.
승문2리 도래·석천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여러 해에 걸쳐 흐르는 동안 흙은 파여 흘러가고 돌만 많이 남게 되자 돌 많은 내라는 뜻에서 돌내로 오래 전해 내려오는 동안 돌내가 도래로 발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걸가 냇가에 4,5가구가 살게 되자 마을 이름이 내가 있는 마을이란데서 유래되어 전(傳)되어 오는 동안 거렁가에서 걸가로 불리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8가구의 농가가 특용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봇목 냇물에 의하여 흙이 파여 골을 이루게 되자 보를 설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농사 짓기가 편리해졌다. 이 때 보 입구에 4,5가구의 농가가 형성되자 이웃 사람들이 보의 목에 있다 해서 봇목이라고 했다.
만방1리 한정이·한정 돌과 돌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샘물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물맛이 좋고 그 물이 차다하여 한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자마이·자만 지형적인 잇점으로 임진왜란 때 은거지(隱居地)였다고 하여 그 후 인근에 산재해 살던 난민들이 피난 처로 생각되어 이곳에 모여 살다 보니 어느덧 큰 동리가 형성되어 골 안에 주택이 꽉 차게 되었다하여 자만(自滿) 또는 자만(者滿)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릉이·종릉 조선 태종이 등극 전 류씨(柳氏)성을 가진 친구와 함께 글공부를 했었는데 등극 후 친구 류씨(柳氏)에게 조선 개국에 대한 협조를 구했으나 류씨(柳氏)는 이를 거절하고, 지금의 이 곳에 내려와 종산서원(鐘山書院)을 세우고 글공부를 하다 죽었다. 그 소식을 듣고 태종이 친구와의 옛정을 기려 柳氏의 묘를 능으로 칭하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을 종산서원(鐘山書院)의 종자(鐘字)와 류릉(柳陵)의 능자(陵字)를 따서 종릉(鐘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랫마 새뱅이란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 입구에 오래된 고목이 있었는데 이 고목(古木)을 중심하여 그 아래에 마을이 생기게 되자 이 마을을 새뱅이 사람들이 아랫마라고 부른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되고 있다.
양지마 새뱅이 마을의 중간에 작은 개울이 있다. 이 개울을 중심하여 양지쪽에 위치하고있는 마을을 양지마라고 하는데 2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이다.
음지마 양지마의 뒤쪽에 마을이 형성되자 음지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음지마을이라 이름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만방2리 새배이·쇄배이·새뱅이·신방 임진왜란 때 순흥 안씨 영양남씨 양성(順興 安氏 英陽南氏 兩姓)이 입주하여 은거하던 곳이며 마을 입구에 반석 (盤石)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방 1m되는 자연석정이 있다. 이 석정(石井)의 청량수가 현재까지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영가북방(永嘉北方) 70리에 화개지지(花開之地)가 곧 신방(新芳)이라하여 쇄배이라고 하였다 한다.
우무실·우곡 임진왜란 때 인명(人命)과 재산이 모두 피해 없이 세(世)청출입(出入)을 피(避)하며 우인자처(愚人自處)라여 우곡(愚谷)이라 칭하다가 무우세거(無憂世居)함에 우무(憂無)실이라고 하였다.
적동1리 적동 본래 영천군(榮川郡) 적포면의 지역으로서 적벽바위 동쪽이 되므로 적동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적서동 일부와 권선면(權先面)의 월호동 일부를 병합하여 적동리라 해서 영주시 문수면에 편입되었다.
본마·보팔 현재 문수 중부초등학교 뒷산 구릉성을 보팔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4,5가구가 형성(形成)되자 산구릉 이름을 따서 보팔이라고 불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양달몰·음달몰 원래가 사느래였는데 사천(沙川)이라고 부르개 된 동기는 마을 중앙으로 사천(沙川)이 흘러 사(沙)와 천 (川)의 음(音)을 따서 사느래라 하였으며 한씨(韓氏)가 먼저 이 마늘을 개천하였으면 그후 임씨(林氏)가 이어 이 마을에 살게 되면서부터 양달몰이라 이름하였으며, 양달몰은 사느래 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남쪽에 있는 마을을 음달몰이라 하게 되었다.
사느네·사천 마을 중앙으로 사천(沙川)이 있어 사자(沙字)와 천자(川字)의 음과 뜻을 따서 사느네라 한다. 약 200여년 전에 한씨(韓氏)가 먼저, 그 다음 임씨(林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적동2리 장바우·장암·장암 400여 년 전 선성 김씨(宣城 金氏)가 이마을을 개척했으며 큰 바위가 있어 장바우라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후 장암(莊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별·적벽 마을 옆 붉은 바위를 적벽암(赤壁岩)이라 했고 적벽(赤壁)이 다시 제별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다.
탑거리·탑동 마을 안에 문수원(文殊院)과 절이 있었는데 절은 유실(流失) 매몰되었고 절의 5층 탑은 부분별로 어디론가 옮겨졌다. 그 탑이 길목에 있었다 하여 탑거리라고 하였다.
재별·적벽·제벽 1910년 직후 현 문수면 적동리 속칭 탑거리 입구에 붉은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를 적벽암(赤壁岩)이라 하였으며, 이 적벽(赤壁)이 다시 제벽(齊壁)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바위를 깃점으로 하여 남원천(南院川)을 경계로 동쪽을 적동(赤東), 서쪽을 적서(赤西)라 부르고 있다.
권선리 고란골·고란곡·난곡 본래 영천군 권선면(榮川郡 權先面) 소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권선동(權先洞)이 되었다. 옛 박난고 선생(朴蘭皐 先生)이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짓고 한문(漢文)을 가르쳤다 하여 난고서당(蘭皐書堂)의 고자(皐字)와 박란구 선생(先生)의 첫 이름자 난자(蘭字)를 따서 고란골이라고 했다 한다.
뒷골·후곡 고란골 마을이 형성된 후 뒷골에 또 마을이 형성되자 고란골 사람들이 뒷골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누루실·황곡 을이 형성된 후 동리 사람들이 계곡(溪谷)의 흙 색깔이 다른 곳보다 유달리 황색이어서 누루 황자(黃字)의 음을 따서 누루실이라고 마을 사람이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선발 옛날 난곡동리(蘭谷洞里)가 형성되기 전에 난곡(蘭谷) 동쪽 좀 떨어진 곳에 권선발이란 작은 마을이 있었으나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마을은 없어지고 이곳 주민들은 고란곡으로 모여 살게 되고,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 버렸다.
월호1리 다락골·월곡 마을 뒷산 형국이 반달 같아서 지은 이름이다. 상월(上月)은 살림이 번창하다가 보름이 지나면 차차가세가 기울어져 3대를 못 넘긴다고 하며 정월대보름날 달을 먼저 보면 그 해 운수대길(運數大吉)하여 총각·처녀는 장가가고 출가한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주안·성잠동 옛날 이 곳에 숲이 우거져 있었다. 하여 한 동안 수안이라 불려 왔으나 1943년에 처음 입주한 주민들이 양잠을 많이 했으며 마을 뒷산인 잠두산(누에머리 살)의 잠자(蠶字)를 따서 지금은 성잠동(盛蠶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월호2리 기와고개·개와고개·와현 이 마을에는 조선조 중엽에는 기와를 구워서 인근 동리에 팔아 생활했다고 하며 지금도 동시에 찰흙이 많고 기과굴의 흔적이 있다. 와현(瓦峴)은 문수면(文殊面)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새마을·새마·신촌 수도(水島)에 살던 선성김씨(宣城 金氏)의 일부분이 농토를 따라 새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므로 새마을·새마·신촌(新村)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13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업이 농업이다.
월호3리 원정골·원창 고려 때 원창(元昌)이란 고을 원이 살았다고 하여 그로인하여 골 이름을 원창(元昌)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지금은 원정골이라고 부른다. 원정골은 각성(各姓)이 모여 취락을 이루어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대양1리 전닷·전도· 도촌 조선조의 명의 이연간(名醫 李硯幹)이 명나라 황제의 병을 고쳐 주고 돌아왔으며 이에 우리 조정에서 이연간 (李硯幹)에게 대청(大廳)을 건축해 주었으며 수대(數代)를 거처하다가 손서(孫壻) 황세평(黃世平)에 넘겨 주고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반상(班常)의 구별이 심하며 나씨(羅氏)·조씨(趙氏)·신씨(辛氏)·권씨(權氏)등이 살고 있다.
대양2리 문고개·문현 지금 43가구가 살고 있으며 옛날에 문수암(文殊庵)이라는 사원(寺院)이 있었다고 한다. 서편에 대문이 있었는데 자주 열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한에 그 고개 이름을 문고개라고 하고 마을 이름을 문현 (文峴)이라 부르게되었다 한다.
궁터·궁기 뒷산맥이 활같이 생겨서 궁터라고 하며 대궁·소궁(大弓·小弓)이 있고 주민 다수가 정감록 신자(信者)로 모인 촌락이며 6.25격전 때에도 이 마을에서는 한 사람도 궂은 일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꽃뱅이·화계·화방 지금부터 500년 전에 안동 권씨(安東 權氏)들이 뒷산에 묘를 쓰고 그 산이 꽃망울 같다고 하여 화방(花芳)이라고 부른 것이 지금은 꽃뱅이라 부른다고 한다.
탄산리 머름·머럼·원암 지금부터 약400년전 박경승이라는 선비가 개척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암석이 흩어져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기이하여 원암(遠岩)이라 일컬었으며 지금은 머름 또는 머럼이라고 부르고 있다.
술미·하탄 지금부터 약300년전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개척했으며 서쪽을 뒤로 하여 동향으로 집을 짓고 농주를 빚어 먹어 보니 술맛이 별미여서 술맛을 따서 酒味라고 일컫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주(酒)의 뜻을 따서 술미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다. 하탄 (下炭)이라는 동리는 동일 지역이며 옛날에 숯을 굽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해서 하탄(下炭)이라 일컫고 있다.
몽동골·무동골·무동곡 아이가 춤추는 형용(形容)이라 하여 무동곡(舞童谷)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와전되어 몽동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현재는 두 가구만 살고 있다.
수도리 무섬·수도 약1666년 박수라는 선비가 개척하여 손서(孫壻) 선성(宣城) 김씨(金氏)를 불러 같은 동리에서 생활 (生活)하게 하였다. 내성천(乃城川)과 남원천(南院川)이 합류되는 곳이며 동리 뒤에는 가파른 산이 있고 삼면(三面)은 강으로 싸여 섬같이 되었으므로 수도(水島)라고 부른다. 수도리(水島里)에는 농토가 전혀 없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소드리·송평 무섬에서 강 하류로 약 1.5km쯤 내려간 곳에 위치하여 각성(各姓)이 살고 있는 마을이 송평(松平)마을이며 지금은 소드리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조제1리 분계 달성 서씨(達成 徐氏)가문의 한 선비가 약 50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삼계·멱실·샛골·잔도리 가는 분기점(分岐點)이라 하여 분계라 칭하였다.
잔도리·작평 약 500년 전에 청풍 김씨(淸風 金氏)가 많이 살던 곳이며 이 마을이 본 지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계곡이 긴 관계로 올라 오면서 사닥다리와 같이 밟고 올라와야 하므로 사다리를 밟는 동리라 하여 잔도리라 일컫는다. 사이골·샛골·간곡 약400년 전에 반남(潘南)박씨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도
사이골·샛골·간곡 약 400년 전에 반남(潘南)박씨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잔도리와 분계의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사이골이라 한다.
조제2리 멱실·이곡 약 300년 전에 경주 김씨(慶州 金氏)와 예천 임씨(醴泉 林氏)가 내성천(乃城川)연안에 12실의 피난처 (避難處)가 있다하여 양성(兩姓)이 이 곳에 정착했다. 실字 든 곳을 찾았다고 해서 멱실이라 한다.
세거리·삼계 약 200년 전에 영해 박씨(寧海 朴氏)가 입주하였으며 금영골·화방·乃城川 3개 골의 물이 합수가 되어 흐른다고 하여 세거리라 한다.
금영골·금영곡 약 300년 전에 예천 임씨(林氏)가 입주하여 살았으며 금영골의 본명은 못이 있다하여 금연곡(今淵谷)이라했으며 그 후 금영사(今寧寺)가 있었다고 하여 금영골이라 칭하였다.

장수면 지명유래

장수면 지명유래
리별 유래
반구리 약 500년전 경주 최씨가 이마을을 개척 하였다고 하는데 마을안에 의성 김씨 선산의 터가 연화부수(漣花浮水)의 반(盤)과 같다고 해서 반두들이라 불러오다가 반구(盤邱)라 부르게 되었다.
두전리 약 300년전에 단양우씨(丹陽禹氏) 우정옥(禹正玉)이란 선비가 개척을 했으며, 양편 산세가 위로 기울어 있다고 해서 盤山이라고 부르다가 반짐이로 부르게 되었다.
갈산리 이마을은 경주 이씨인 성오당(省吾堂) 이계립 선생의 후예(後裔)가 하갈(下葛)에서 살다가 수해를 당하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하갈보다 위쪽에 위치한 곳이라 해서 윗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파지리 약 400년전에 안동권씨가 개척한 마을인데 옛날 마을뒷산 바위에 선녀가 가마를 타고 내려와서 이 바위 위에서 놀다가 갔다는 전설에 따라 그 바위를 가마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며, 바위밑에 마을이 이루어 졌따고 해서 바우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곡리 이 마을 뒷산을 주마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옛날 어떤 도사가 달리는 말을 소리쳐서 세웠는데 달리던 말이 그대로 큰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마산(走馬山)이라 부르고 이 마을을 달리는 말의 배에 두른 띠 부분에 위치한다 하여 배태라고 불러 왔다고 하며, 현재는 성곡리라고 부르고 있다.
화기리 고려시대에 具氏가 개척 하였는데 그후 민씨(閔氏)가 살았으나, 조선조 세조때 장말손(張末孫)의 현손(玄孫)인 대호군(大護軍) 언상(彦祥)씨(氏)가 380년전 문경군 산북면 내화에서 이주하여 마을 이름을 화계(花溪)라 불렀다. 화기(花岐)란 뜻은 화계의 화자와 이마을 뒷산인 기산의 기자를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연복군(延福君) 6대조인 장 계(張 桂)의 고려홍비(高麗紅碑)가 1972년 보물제 501호로 지정되어 있고 연복군 장말손의 영정이 제502호로, 적(敵)가 공신교서(功臣敎書)가 제604호로 지정되어 있음.
소룡리 약 400년전에 송시웅의 외조부인 권호문(權好文)이란 선비가 자기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호문이라 불러 오다가 호고촌(好古村)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다시 호구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호문리 약 400년전 조선조 선조때 감천대산(甘泉大山)이란 곳에서 손시황(孫是愰)이란 분이 이 마을로 이주하여 산을 살펴보니 둘레의 산세가 마치 곰 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웅곡(熊谷) 곰실로 부르고 있다.

안정면 지명유래

안정면 지명유래
리별 유래
신전리
(新田)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으로서 새로개척된 마을이므로 새기실 ·샛기실 또는 신전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가 영주가 시로 승격하자 영주군 안정면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는 구노인 (九老人)이 마을앞 언덕위에 서있는 큰 향(香)나무 그늘에 모여서 바둑을 즐기며 시문(詩文)을 읊었다고 한다. 이들은 또 마을앞의 들을 개척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바 구노인이 농사를 지어서 구억석(九億石)을 얻었다고 하여 구억들이라고도 칭한다.
생현리
(生峴)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이었다. 그위치가 사실고개 밑이 되므로 사실고개 또는 생고개·생현리라 하며 이 이름을 따서 조선조 때는 생현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동(松洞)을 병합하여 생현동이라 하며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봉암리
(鳳岩)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이었다. 뒷산에 부엉바위가 있었다 하여 부엉바우 또는 부암·봉암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부암동·외부암동을 병합하여 봉암동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용산리
(龍山)
본래 순흥부 대룡산면 대촌리,어은리,도촌리,사계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4개 법정리를 용산리로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약,섬마,고촌,재실,대촌,사계 등의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마을은 1400년경 순흥안씨가에서 개척한 이후 1573년경 창원황씨가 취락을 형성했다고 한다.
여륵리
(汝勒)
이 마을의 뒷산은 주마산과 용암산이 맞닿은 곳이며 이 두산을 한데 묶어 보면 주마산은 말의 등과 배의 모양이고 용암산은 말의 모리와 굴레의 형상이므로 주마산아래 마을을 배태마을이라 하고 말의 굴레 부분에 위치한 이마을을 여륵리·너르기·광천·사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묵리
(墨)
한고개 서쪽에 깊은 산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는 깊고 길어서 한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이 때문에 이마을의 이름을 가막골·까막골이라고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루모기·한고개·반지미·새마을을 병합하여 묵동이라 한다.
내줄리
(內茁)
골이 깊고 풀이 무성해 풀을 베어낸 뒤 마을은 만들었다 하여 내줄동(內茁洞)이라고 한다. 자연부락은 내줄·점마을·동명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일원리
(逸園)
본래 풍기군 동촌면의 지역이었으며 딱밭 또는 일언·일원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입암동을 병합하여 일원동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안심리
(安心)
본래 풍기군 동촌면 지역이었다. 안시미 또는 안심·안심리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제동·일원동 일부를 병합하여 안심동이라 해서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기름지고 넓은 토지가 있어서 주민이 안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옹암리
(瓮岩)
마을 뒷산에 독바위가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독바우 또는 옹암이라 한다. 본래 풍기군 동촌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심동 일부를 병합하여 옹암동이라 해서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단촌리
(丹村)
백골·저술·홈다리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래 풍기군 동촌면 단촌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정면 동촌리로 개편되었다.
대평리
(大坪)
본래 순흥부 대평면의 지역이며 큰들이 있으므로 한들 또는 대평이라 하였다. 조선조 세조3년 순흥부가 폐지되자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홍교동과 단촌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평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오계리
(梧溪)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에 개척된 마을이며 개척당시 오동나무가 뒷산에 많으므로 오산이라고 불렀다. 1909년 오산을 오미로, 오미를 다시 오계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동촌리
(東村)
본래 풍기군 동촌면의 지역으로서 동촌면사무소가 있으므로 동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합도동 · 아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촌동이라 해서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봉현면 지명유래

봉현면 지명유래
리별 자연부락 유래
두산1리 주치골
  • 주치골(朱致谷)-약 400여년 전 조선조 명종때 남사고란 사람이 뒷 산목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하며 사고막재 라고 불리운 고개가 있었다 한다. 이 고을에서 생산품으로 두류(豆 類)가 많이 생산되어 두치(豆致),두치(斗致)라고 하였고 질그릇을 칠하는 주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주치(朱致)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재는 주치골로 불리고 있다.
두산2리 소 미
  • 소미-구한말 이지역명이 풍기군와룡면우산리(牛山里)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영주군 봉현면 두산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우산리 즉 소우(牛)자의 “소”자를 따고 뫼산(山)자의 “뫼”자를 따서 “소뫼”라고 부르게 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와전이 되어 “소뫼”가 “소미”로 되었다 한다.
수용골
  • 수용골(水龍谷)-1850년도부터 주민들이 살게 되었으며 모양이 용 같이 생긴 곳에서 물이 솟아 나와 흐른다하여 마을을 수용골이라고 불러 왔다 한다.
두산3리 홍정골
  • 홍정골(洪井谷)-옛날부터 홍정골이란 기러기 홍(鴻)자,머무를 정(停)자로 썼는데 어쩐 일인지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고민 했었는데 어떤 무명의 대사에 의하여 마을 이름을 넓을 홍(洪)자 우물 정(井)자로 개명했더니 화재의 빈도가 현저히 줄어졌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홍(洪)씨가 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는 우물 곁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한다. 그 사람이 어쩐일인지 5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이 우물에 백일 정성을 들여 생남 하였는데 그 태몽에 용의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 바위를 용수암(龍水岩)이라고 하였으며 그 우물에 자신의 성을 따라 홍정(洪井)이라 이름 짓고 마을 이름도 홍정골이라 불러 왔다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본 마을 앞에 숲이 있었고 앞들에 철따라 기러기와 학이 이 숲과 들에 날아와 가관을 이루어 홍정골(鴻停谷)이라고 불었다 고도 한다.
꺼치네
  • 꺼치네-홍정골에서 동(東)으로 약 700m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서 홍정골 뒷산 마늘봉에서 산 능선이 쭉 길게 뻗어 지경터까지 연하였고 그 야산에 쌓인 외딴 마을이다. 서(西)로는 도솔봉이요 북(北)으로는 소백산 줄기로 내려온 금계바위를 앞으로 보고 있다.
    1900년경 봉화 해저에서 이주 해온 의성김씨 창원(昌遠1879-) 호는 도은공(도솔봉 하(下)에서 은거하여 살아 간다는 뜻)께서 이마을을 신개척하여 샛터(新基洞)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에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솟는다 하여 거천리(巨泉里 또는 居泉里)라 하였다가 1980년경에 와서 “꺼치네”로 와전되어 좋지 못한 음감이라 하여 이름을 서로 친(親)하고 사랑(愛)하는 뜻으로 살아가고자 거친애(居親愛)라 칭하였다 한다.현재는 꺼치네라고 불리고 있다.
지경터
  • 지경터(地境터)-주치골과 수용골 방향에서 흘러 내려오는 냇물이 지경터에 이르러 하천 양쪽에 산재해 있는 마을을 지경터라 칭한다.하천을 경계로 서북편은 행정구역산 두산2동에 속하고 하천 동남편은 두산3동에 속한다. 1856년 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인근 마을 남원촌(南院村)과 떨어져 경계를 이루는 곳이라 하여 지경터라고 칭하였다 한다.
오현1리 남 원
  • 남원(南院)-남원은 풍기군 당시 행인과 관원들이 유숙하는 국영여인숙(國營旅人宿)이 풍기 남쪽에 위치하여 남원이라 불렀다.
까치섬
  • 지형적인 잇점으로 임진왜란 때 은거지(隱居地)였다고 하여 그 후 인근에 산재해 살던 난민들이 피난 처로 생각되어 이곳에 모여 살다 보니 어느덧 큰 동리가 형성되어 골 안에 주택이 꽉 차게 되었다하여 자만(自滿) 또는 자만(者滿)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현2리 엄고개
  • 엄고개-오향골 서쪽에 있는 긴 고개 이름이 엄고개인데 그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엄고개라 불렀다. 이 마을은 약 700년 전에 도씨(都氏)라는 선비가 이 곳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마을 앞에 있는 동산을 넘어서 마을에 들어온다고 엄고개라 불러 왔다고 한다.
자갈모래이
  • 자갈모래이-오향동 북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서 자갈이 많고 뒷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밤수산골, 자갈모래이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오현3리 오향골
  • 오향골은 오현동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모양이 외양간과 같다하여 오향골이라 불렀다 한다. 또 이골은 약 480년전에 오향사(梧香寺)라는 사찰(寺刹)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인하여 없어졌다. 그 후 오향사 절 이름을 따서 오향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현동으로 개칭되었다.
오현4리 뒤밭
  • 뒤밭-오현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띠(잔디)가 많이 나는 밭이 많아서 띠밭이라 불리웠다. 옛날 문경과 충주로 왕래 하는 과객을 숙박시키기 위한 마방(馬房)으로 하여금 마을이 형성되고 개척 되었다고 전한다.
윗뒤밭  
대촌1리 와룡골
  • 와룡골-용감동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룡골이라 하였다 와룡골이라 하고 면 이름도 와룡면이라 칭하였는데 마을이 크므로 큰 마을 또는 대촌(大村)이라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 양지쪽을 양지마을, 남쪽을 음지마을이라 하였다.이 마을은 예전에는 땅이 아주 메마른 곳으로 불모지로 내려왔다. 그 때문에 일명 갱변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아두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동으로 희나무 고개와 영등 바위가 있고 희나무 고개에는 큰 희나무와 노송이 있어서 희나무 고개라 하였으며 영등 바위에서는 영등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여 온다.
백부이
  • 백부이-백부이는 이곳에 밀이 잘 되어 밀가루를 많이 생산한다 하여 백분 또는 백부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아래 백부이는 안정면 생현동으로 편입되고 윗백부이는 봉현면 대촌동에 속하고 있다.
대촌2리 주성골
  • 주성골(珠星谷)- 용이 와룡청수에서 물을 마시고 주성동에서 여의주를 얻은 형상이라 하여 주성동이라 하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약 340년 전에 광산김씨의 선조인 진현(振鉉)이란 사람이 다래 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주성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촌2동으로 분동되었다.
한천리 샘골
  • 샘골-집집마다 샘이 있어 샘골이라 칭하였다.본래 풍기군 와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한동(水寒洞),천동(泉洞),대촌동(大村洞)일부를 병합하여 수한과 천동의 이름을 따서 한천동(寒泉洞)이라 하였다.
무래이
  • 무래이- 한천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물한이라하고 또 무래이라 불러왔다. 마을 위쪽에 위치한 마을을 웃무래이라 부르고 있다.
윗무래이  
유전1리 주막거리
  • 주막거리-진밭 남동쪽에 있는 이 거리 마을은 예로부터 진밭, 버드래이, 짤드매기, 점말로 가는 분기점이며 풍기에서 예천으로 통하는 행인이 많아 객주집 비슷한 주막이 잇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리어 왔다. 마을에 큰 노송이 있기 때문에 송정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진밭
  • 진밭-옛날부터 마을주위에 진흙밭이 잇어 일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진밭(泥田) 또는 이전동(泥田洞)이라 칭하였다.
유전2리 힛트재
  • 힛트재-힛트재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된 연대는 미상이나 처음에는 시령(尸嶺)이라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힛트재로 변했다고 한다. 처음의 시령이라 이름 지어진 것은 그 재의 서편에 둥지리 봉이 있고 그 밑에 약물탕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처녀가 그 약물을 먹고 재에 와서 까닭 모르게 죽었다 한다. 그래서 시령이라 이름 짓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현판명을 영왕(靈王)이라 서 붙이고 인근 마을에서 매년 무사고를 빌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집없는 마을로 수백년이 지나오다가 1900년 초부터 인근에서 한집두집 모여 들기 시작하여 재말, 힛트재말이라 불렀다.
버드래이
  • 버드래이-옛날 버드나무 그늘이 좋아서 유음동(柳陰洞) 또는 버드래미라 칭하였다.버드나무 둘레가 약 10m가량 되며 높이도 약 20m정도 되는 큰 버드나무가 있어 여름의 휴식처가 되었으며 인근 마을의 힘센 장사들이 모여 씨름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짤드매기
  • 짤드매기-건너마을에서 보면 마을 바로 뒤에서 달이 뜨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달뜨매기 또는 월현(月峴)이라 불렀던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음이 변하여 짤드매기로 불리고 있다.
노좌1리 노재이
  • 노재이-약 800여년전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전하여 오나 개척인물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산 주마산밑에 마부가 살았는데 이 마을 이름이 노자(奴字),자자(者字)로 전해 왔는데 약 250년전 진성이씨 경활이라는선비가 동명 (洞名)이 상스럽다하여 노자(奴者)를 노좌(魯佐)로 바꾸었다고 한다. 노좌라는 명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재이라 하였다.
노좌2리 사리미
  • 사리미-고려말 한추월(韓秋月)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뒷산 형세가 “白”자 모양이어서 백산이라 칭하고 마을을 백산동이라 칭하였다. 그후 조선조 말에 김경업(金敬業)이라는 선비가 추월공이 독서를 하였다 하여 사림리(士林里)라 하였다. 현재는 사리미로 불리고 있다.
새 말
  • 새말-사리미 마을에서 디리목 마을로 가는 우측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1905년경 입주자가 생기기 시작하여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새말(새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좌3리 추월당
  • 추월당(秋月堂)-조선 중엽 자구산 중턱 다래덩굴을 헤치고 처음 이곳 피난지를 찾아 은거한 사람의 성은 한(韓)이요 호는 추월(秋月)인데 추월당을 짓고 훈학도 하였다는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추월선생의 호를 따서 추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리목
  • 다리목-옛날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자구산과 천부산 골자기에 약초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러 왔다가 마을골 안이 다래기 같이 생겼다고 다래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처음 이골을 개척할 때 많은 다래 숲을 헤치고 개척하여 다래가 많은 골이라하여 다래골(多來村)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으며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었다 하여 다리목으로 불린다는 설도 있다.
중 말
  • 중말-동네를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있어 전란 때 피난지로서 적합한 곳이라 하여 생긴 마을로서 추월당을 중심으로 해서 산중간이며 상말과 추월당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말(중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촌1리 하 촌
  • 하촌(下村)-본래 풍기군 노좌면의 지역으로서 옛날 이 마을에 큰 못이 있어 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꽃마을이라 하여 화촌(화촌)이라 부르다가 그 후 노좌동에서 볼 때 아래쪽에 있다하여 하촌이라 하였다.
한 티
  • 한티-하촌에서 예천군 하리면 탑리로 넘어가는 한티재 밑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기온이 냉하나 산능선을 따라 이 마을에 이르면 땀을 흘린다 하여 한현(汗峴)이라고 하였다 한다.
하촌2리 배 골
  • 배골(梨谷)-마을 뒷산이 고무산인데 중턱에서 양쪽으로 뻗어 내린 도장골에 참배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하여 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배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배골이라고도 한다.
쟁피밭
  • 쟁피밭-제방에 쟁피초가 무성하여 쟁피밭이라 불렸다.
새터말
  • 새터말-주마산 기슭 서향지의 아늑한 이곳에 약300년 전 새로운 터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새터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촌3리 배리들
  • 배리들-이 마을의 지형이 벼루처럼 생겼다 하여 벼루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배리들로 변하였다.봉현면과 감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경터와 통틀어 배리들이라고 부른다.

순흥면 지명유래

순흥면 지명유래
리별 유래
태장리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세분의 안태지(安胎地)가 됨으로 태장(台庄)으로 부르고 있으며, 태는 삼공(三公)을 말하고, 장은 곳을 말함
지동리 지곡지, 재방지등 마을주변에 못(池)이 많아 못(池)자를 따서 지동(池洞)으로 부르고 있음
석교리 하천건너 지형이 고양이 몸체형이고 고양이가 쥐있는 곳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600년간 돌다리를 놓고 돌다리로만 건너 다니게 한데서 생긴 지명임
읍내리 순흥면 소재지가 있어 1909년 행정구역 책정시 읍내리라고 칭함
내죽리 속수 : 순흥, 비봉산 밑에 있는 큰 마을을 내죽1리라고 말한다.
송림동 : 개척 당시 마을 입구에 커다란 솔밭이 있엇던 것이 연유되어 생긴 지명임
청구리 본래 순흥부 내죽리의 지역으로서 청뚜들 또는 청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계리, 여근리를 청구리라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음
배점리 조선 선조때 무쇠쟁이 배순(裵純)이 국상을 당하자 상복을 입고 소백산 위에 올라가서 삼년동안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통곡망배하여 충신 정문이 1615년에 내려져서 배충신이라 하고 망배하던 산봉을 국망봉이라 칭하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무쇠점을 주었다. 그 연유로 배점이라 부르게 됨
덕현리 박동수라는 선비가 약 400여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개척당시 옆고개에서 다래와 머루를 얻어 허기를 면했다하여 덕이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덕현리라 칭하게 되었음

단산면 지명유래

지명유래
리별 유래
동원리
(東園里)
본래 순흥부 동원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미리와 오상리 등영리 구구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동원면이 되었는데 그 이름을 동원리라 하였음.
사천리
(沙川里)
옛날 순흥부 때 사상(沙上)이라고 불렀으나, 조선조 때 행정 구역명으로 사천(沙川)이라고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구리
(九邱里)
거북이 모양이라 하여 귀두(龜頭)들이라 칭하였으며 또한 아홉 언덕에 학이 춤을 추고 놀았는데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지금 구구리 뒷산 무학봉(舞鶴峰)이었다고 한다.
병산리
(屛山里)
이 동리에서 대지리로 가는 뒷골의 지형이 병 주둥이가 병목처럼 생기고 병 밑 부분이 큰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흡사 병(甁)과 같아 병산(甁山)그후 행정구역 개편시 동리 뒤편에는 좌우로 군자봉과 옥녀봉이 솟아 있으며 앞산이 병풍을 두른듯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 주고 있어서 병산(屛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단곡리
(丹谷里)
한일 합방을 반대하는 의병들이 진을 치고 싸운 곳이라 하여 진막이라고 하였다 한다.
옥대리
(玉帶里)
산의 능선이 옥띠와 같이 곧게 뻗어 나와 감싸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옥대하고 하였다.
좌석리
(座石里)
마을 한 중간 논바닥에는 앉은 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마귀할멈이 소백산에서 반지를 잃었는데 그 반지를 찾아 산을 파 내려가 골짜기가 생기고 땅 속에서 나온 큰 바위가 골짜기를 굴러내려 오다가 자리에 멈추어서 자리잡았다 하여 앉은 바위라고 불러왔다. 이바위를 중심으로 윗마을을 上座石,下座石이라 부르고 있다.
마락리
(馬落里)
큰 바위로 된 절벽이 있는데 죽령 다음으로 영남과 충북, 강원, 서울 등지로 통하는 주요 통로였다. 상인이 말에 짐을 싣고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광풍으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었는데 말이 죽지 않았다 하여 말굴이라는 한자어인 마락이라고 하였고, 도 조선시대 금성대군과 단종사이에 왕래하던 밀사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마락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부석면 지명유래

부석면 지명유래
리별 유래
甘 谷 里
(감곡리)
감실(監室) 村. 옛날 이 마을 앞에는 鑑湖(감호)라 불리 우는 못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뜻에서 못에 물이 가득 차기를 빌었으며 그 때마다 못물이 가득차서 해마다 풍작을 이룩하였고 그리하여 훗날 감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봉(道蜂)·도복(都卜)·도부랑(桃浮浪) 村) 마을 양편에 산봉우리가 여려 곳에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로 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道蜂)도봉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국모봉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道蜂)도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초기 宋涵(송함)이란 察訪(찰방)이 이 곳을 개척하여 桃浮浪(도부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조 말엽에 와서 (道蜂)도봉이라 개칭 하였다고 한다.
석남(石南)·성남(城南) 村) 마을의 남쪽에 큰 바위가 공중에 뜬 듯 솟아 있어 이를 공중바위라고 하며 이 바위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石南)석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산마을 村) (石南)석남 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산세가 마치 두 팔로서 둥글게 포근히 이 마을 안은 모양을 하여 있기에 안산마을이라고 부른다 한다.
영모암(永慕岩·影慕岩·靈慕庵) 村) 마을 뒷산에 큰 암자가 있었는데 그 암자의 그림자가 바위 같다 해서 影慕岩(영모암)이라 하였으며 또 조상들을 그리는 뜻에서 永慕岩(영모암)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선바우·입암(立岩) 村) 마을 앞 입구에 洞樹인 느티나무 옆에 크고 높은 바위가 충암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흡사 깎아 세운 듯 한 바위가 잇는데서 연유하여 立岩(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둔전마 村) 도부랑 동쪽에 위치한 옛날 화전민들이 몇 집 모여서 화전을 일구어 살던 마을로 지금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폐동이 되었다. 범바위 마을 村) 永慕岩(영모암)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이 마을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바위의 형상이 흡사 범을 닮았다고 해서 범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南 大 里
(남대리)
텃골·기곡(基谷) 村) 南大(남대)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화전민들이 이룩한 마을이다. 남대리(南大里)·남대(南大)·남대궐(南大闕) 村) 順興(순흥)으로 귀양 온 금성대군이 端宗復位(단종복위)를 위해 이곳에서 자주 밀사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남대궐이라는 현판을 붙인 것에 연유한 것이다.
짐또배기·마지천리(馬吱川里)·마흘천(馬屹川) 村) 남대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가장 번성기에는 36가구였으나 현재는 17가구뿐이다. 각 성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약초를 재배하여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샛터·상신기(上新基) 村) 남대궐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종대왕을 흠모하는 백성들로 생긴 화전민 촌이다. 가장 번성기는 32가구였으나 소개령으로 철거 또는 이주로 인하여 현재는 5가구뿐이다.
소란·송내(松內) 村) 남대궐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락장송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며 가장 번성기는 34가구였으나 현재는 12가구이다. 농업의 약초 재배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다.
중마·중리(中里) 村) 소란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가장 번성기는 16가구였으나 거의 이곳을 떠났고 몇 집이 화전을 일구어 생활하고 있다.
魯 谷 里
(노곡리)
남자일·남절·윗호크랭이·호문(好文)·남사동(南寺洞)·남좌동(南佐洞) 村) 용수산의 남쪽 가운데 마을터가 제일 좋다고 하여 南第一(남제일)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음이 와전되어 남절이라 부르고 있다.
은행정(銀杏亭) 村) 魯谷(노곡) 1里(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마을 부근에 雜木(잡목)이 우거져 있고 마을 어귀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동민들이 은행나무를 신성시하여 잘 보호하고 다른 나무는 벌목을 하고 집을 지우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뒤 은행나무 밑에다 亭子(정자)를 짓고 마을의 吉福(길복)을 빌며 살아 왔다하여 銀杏亭(은행정)이라 불려졌다.
망골·두곡(杜谷)·두릉(杜陵)·두신(杜新) 村) 용수산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마을 전체를 막고 있어서 막은 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와전되어 망골로 부르고 있다. 망골·銀杏亭(은행정)·새터를 합하여 두신(杜新) 농촌진흥조합을 만들었으며 두곡(杜谷)의 杜字(두자)와 新基(신기)의 新字(신자)를 따서 (杜新)이라고도 부른다.
양지마·양중동(陽中洞) 村) 小白山脈(소백산맥)의 가개봉에서 이어진 용수산 중턱에 자리잡은 양지 바른 곳이므로 양지 마을이라 부렀다. 일제 때에 양지마을·중마을 낙절을 陽中農村振興組合을 만들었던 까닭에 陽中洞(양중동) 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에서 쑥 들어간 곳에 등심이라는 골짝이 있는데 조선조 말엽에 72名(명)의 隱士(은사)가 속세를 피하여 이곳에 은기 하였다 하여 듬실의 어귀를 杜門洞天(두문동천)이라고도 부른다.
중마·노실·너걱(魯谷)·중리·답곡 村) 여러 마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중마라고 불렀다. 노실이란 명칭은 옛날에 백로가 많이 살았고 백로 집이 많았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며 또 논이 많은 골짜기라고 沓谷이라 한다고도 했다.
새터·신기(新基) 村) 魯谷 1里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망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점차 가구 수가 불어나서 망골에는 집을 더 지을 터가 없기에 새로운 마을로 잡은 곳이며 새로 마을 터를 개척하여 살았다고 하여 새터라 부리어 졌다.
寶 溪 里
(보계리)
보계(寶溪)·보교(寶轎) 村) 마을의 골이 깊어 水源(수원)이 좋으며 가뭄에도 개울의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에 凶豊(흉풍)이 없는 곳이며 이 작은 개울이 보배스럽다고 해서 寶溪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고 또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마치 가마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寶溪라고도 전해 오고 있다.
보게실(寶溪室)·원보계(元寶溪) 村) 보계는 원래 寶溪庵(보계암)이 있어서 연유된 것이라고도 하며 寶溪란 極樂淨土 즉 고뇌가 없는 곳을 일컬으며 마을 깊숙이 산 속에 방같이 둘러 싸여 있어 이 곳을 寶溪室(보계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實字가 든 곳은 避難室(피난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室子가 든 곳은 避難處(피난처)로 알맞았으며 지금도 이곳을 元寶溪라 부르고도 있다.
광챙이·광릉동천(廣陵洞天)·광릉(廣陵)·광창(廣倉) 村) 원래 이 곳을 廣倉으로 불러 왔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르기도 쉽고 소리 나는 대로 광창이로 불렀으며 다시 광챙이로 불리고 있다. 사람에 따라 廣陵洞天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불바우·뿔바위·각암(角岩·珏岩) 村) 마을 입구에 뿔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이런 연유로 뿔바위·珏岩이라 칭하였다. 어원이 차츰 변하여 부르기 쉽게 불러 불로 바위가 바우로 불리어져 불바우라 한다. 그러다가 뿔이란 말이 좋지 않다하여 쌍구슬 각字를 써서 珏岩이라고도 쓴다.
상모치·점마·모치방(慕痴坊)·모치(毛致) 村) 모치래기(메추라기)라는 새가 이곳에 있었는데 마을의 산이 모치래기 새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毛致(모치)라 칭하였다 한다. 자연 부락이 산재되어 있고 위쪽을 上毛致, 가운데를 中毛致, 아래쪽을 下毛致라 부르고 있다.
후바우·오룡동(五龍洞) 村) 60여 년 전에는 이곳을 호바우라고 칭하였다 하며 그 후 송원식이라는 사람이 와서 앞산의 봉우리가 용같이 생긴 다섯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五龍洞이라고 命名하여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응징이·응정(應亭) 村) 마을 앞산의 모양이 매의 부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應亭(응정)이라고 불렀으며 그 후 점차로 발음이 訛傳(와전)되어 지금은 응징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좌실(文佐室) 村) 불바우 마을에서 북서 간 약 1km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창원 黃氏(황씨)들의 薺室(제실)이 단 한 집 있을 뿐이며 주위에는 황씨 先代(선대)의 묘지가 산재하고 있다.
제궁골·제궁마·제궁마을·제궁촌(薺宮村) 村) 廣倉 남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곳에 宣城(선성) 金氏(김씨)들의 薺宮(제궁)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제궁마 또는 薺宮村(제궁촌)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하모치(下毛致) 村) 상모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에 상모치·중모치·하모치의 세 개 자연 부락이 타원형으로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산재되어 있다.
北 枝 里
(북지리)
갓띠·북지리(北枝里)·관대(冠帶) 村) 마을의 뒷산에 갓 모양이며 그 기슭에 마을이 띠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으므로 갓띄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순흥군 봉양면 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영주군 부석면에 편입되었다. 조선조 中宗(중종) 이후 淸州(청주) 鄭氏(정씨)가 群居(군거)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가구만 살고 있다.
송두들·속두들·송고(松皐) 村) 소백 소맥에서 흐르는 溪谷(계곡)의 맑은 물이 동리 중심을 뚫고 흐르고 있으며 景觀이 좋을 뿐 아니라 부석사와 地境(지경)한 마을로서 사찰 외곽을 둘러싼 松林(송림)이 마을 뒤에 우거져 언덕을 이루었기에 송두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방골·방동(方洞) 村) 부석사 동쪽에 위치한 인접 촌락으로 부석사 전성기에는 僧坊(승방)이 있는 洞里(동리) 즉 房洞(방동)이 와전되어 方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은 30여 가구가 취락을 이루고 있다.
허뭇거리·허문거리(虛門一) 신기(新基) 村) 浮石寺(부석사) 입구에 자리 잡은 山村(산촌)이며 奉花(봉화) 物野(물야) 方面(방면)으로 가는 노변에 위치한 관계로 행인들의 약탈 등 행패가 심하여 마을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마을 입구의 골목을 없애고 문을 페쇄해 버렸으며 이런 연유로 허뭇거리라 일컫게 되었다. 지금의 마을은 그 뒤 질서가 잡히자 위치를 옮겨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신기라고 했다.
上 石 里
(상석리)
수사(水沙) 村) 上石里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 질러 흐르는 내가 잇는데 그 중에서 이 마을 앞 내가 다른 곳보다 물이 많이 흐르고 모래가 많이 쌓였다하여 옛날부터 水沙(수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탄(挑灘)·석탄(石灘) 村) 옛날에는 이 마을 앞에는 돌여울이 흐르고 있어 石灘이라 불리어 왔다 조선 시대 順興府에 속해 있을 때 石灘은 도강면 감산 봉양면에 소속되었고 또 이곳에 道岡書堂(도강서당)이 있었으며 복숭아나무가 많았다는 데 연유되어 桃灘(도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솔안·송내(松內) 村) 이 마을 주위에는 수백 년이나 되는 老松(노송)들이 松林(송림)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노송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松林 속의 마을이라고 하여 솔안 또는 송내라고 불렀다.
감살미·감산(甘山) 村) 이 마을 둘레의 산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옛날에는 이곳에 감나무가 많이 있는 산밑이라는 데 연유하여 甘山이라 하였다. 지금은 부르기 쉽게 소리 나는 그대로 감살미로 부르고 있다.
들마·평촌들·평촌(坪村) 村) 들이 넓고 들 가운데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해서 들마을이라고 불렀다. 170년 전에 들 옆의 산기슭으로 마을을 옮겨서 평촌이라 부른다.
고산(高山·孤山) 村) 마을 뒤에 우뚝 솟은 외로운 산이라서 孤山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順興府(순흥부) 당시 高山里(고산리)로 불러 왔으며 또한 山勢(산세)가 높다고 해서 高山(고산)으로도 부르고 있다.
韶 川 里
(소천리)
남산(南山) 村) 면소재지 남동쪽에 위치한 丘陵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老松이 울창한 風致林(풍치림)을 이루고 있으며 구릉 남동쪽에 인가가 30여 가구 모여 있고 景致(경치)가 빼어 난 마을이다.
달터·월대(月帶) 村) 韶川(소천) 5里(리)에 속한 자연 부락 중 가장 작은 마을로서 마을을 둘러싼 山勢(산세)가 아름다운 半月形局(반월형국)이며 다래 덩굴이 우거진 밑에 몇 가구가 집을 지어 살았는데 다래 덩굴 밑에서 달이 뜨는 것을 보면 달이 띠를 두른 듯 하다하여 月帶(월대)라 하였으며 그 뒤 우리말로 달터라 불려졌다.
두들마(坡上洞) 村) 마을의 생긴 모양이 뱃머리 형상이며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데서 두들마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물이 나지 않아 마을 동쪽의 내 건너에 있는 우물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옛날 鄭(정) 玉(옥) 黃海道(황해도) 監司(감사)가 태어났을 때 심었다고 하며 樹令(수령)이 약 280여 년 된다고 하며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물구지·물거지(勿居地)·수양동(水陽洞) 村) 양지바르고 따뜻한 마을이며 물이 맑고, 호수처럼 생겼다고 하여 물구지라 불렀다. 아무리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라도 따뜻한 마을이라 한다. 마을 앞에 城隍堂(성황당)이 있고 동민의 吉福(길복)을 기원하고 풍년을 빌기 위하여 지금도 음력 정월 보름날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봉래골·도래동·봉래(蓬萊) 村) 옛날에 양 봉래라는 사람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蓬萊洞(봉래동)이라고도 하였다.
봉래골 남동쪽에 위치한 蓬萊寺(봉래사)는 1953년에 法華宗(법화종)의 사찰로 건축하였으나 그 후 天台宗(천태종)으로 改宗(개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그랭이·사문(沙文)·상사문(上沙文) 村) 옛날에 학문이 높은 선비 金熙紹(김희소)가 경치가 좋은 산천을 찾아다니며 글 읽기를 즐기던 바 이 동네에 있는 폭포에서 글을 읽고 폭포로 이루어진 모래밭에 글을 썼다고 하여 동명을 沙文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에는 이곳에 옛날부터 사기그릇을 굽는 옹기굴이 있어서 사그랭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내·쇠내·소천(韶川)·우천(牛川)·하사문9下沙文) 村) 浮石面(부석면) 소재지 마을이며 옛날에는 牛川·소내·쇠내라고 불렀다. 鳳凰産(봉황산)밑에 위치하여 봉황산과 연유한 봉황새는 風流(풍류)를 좋아한다고 牛字(우자)를 韶字(소자)로 변경시켜 韶川(소천)이라 하였다고도 하며 또 일설에는 鄭(정) 玉(옥) 監司(감사)의 號(호)가 牛川(우천)이라서 牛川이라 하다가 韶川(소천)으로 개칭되었다고도 한다.
진골·장곡(長谷) 村) 韶川(소천) 2里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뒤편에 낮은 산줄기가 연이어져 있는 긴 골짜기로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 安東(안동) 金氏(김씨)의 늙은이가 이 골자기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그 뒤 인가가 골짜기에 길게 들어서게 되어 長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가 지금은 우리말로 진골이라 부르고 있다.
탑두리·탑들·탑평(塔坪) 村) 동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탑이 있었다. 탑을 세운 연유는 지형이 蛇頭形(사두형)으로 생겨 당시 뱀이 많아서 사람의 왕래가 곤란하여 소통책으로 蛇頭形(사두형)의 목을 자르고 水路(수로)를 낸 후 蛇頭(사두) 지점에 탑을 세우고 지명을 塔坪(탑평)이라 하였으니 그 후부터는 뱀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탑이 없어졌으나 塔(탑)이 섰던 저리는 남아 있다.
새마을 村) 韶川(소천) 3里(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소천 동네를 동서로 흐르는 沙門川(사문천) 냇가에 형성된 마을이나 1972년의 집중 폭우로 가옥 전답이 매몰 유실되어서 정부의 수해 복구 사업으로 새마을 주택을 집단으로 신축하여 새로운 부락이 형성되었다. 그 뒤 새마을 주택으로만 이루어진 마을이라 새마을로 불려졌다.
재궁터 村) 韶川(소천) 6里(리)에 속한 마을로서 塔坪(탑평) 마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마을이 처음 생길 때는 昌原(창원) 黃氏(황씨)들이 산기슭을 개간하여 터를 잡고 살아 왔으며 그 마을에 昌原(창원) 黃氏(황씨)들이 薺室(제실)을 지운 뒤부터 제궁터라 부르고 있다.
龍 岩 里
(용암리)
화부(花釜)·교천(交川)·화감(花甘) 村) 산의 형상이 花釜之形(화부지형)으로 부근이 지면보다 높아서 흡사 꽃봉오리가 피어 있는 모양으로 보이며 그 꽃봉오리 안에 동네가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花釜洞이라 한다. 한편 이는 風水地理說(풍수지리설)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동네는 延安(연안) 金氏(김씨)의 世居地(세거지)이며 옛날부터 萬石巨富(만석거부)로 양반이 행세하며 살아 오던 곳이다.
망가매 만갑(萬甲)·망감(望甘) 村) 마을 앞산의 지형이 萬甲藏身之形(만갑장신지형)과 같다고 하여 萬甲(만갑)이라 하였다 한다. 옛날 道僧(도승)이 이동네를 지나가다가 앞산을 바라보며 절을 네 번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만갑 앞들을 四拜(사배)들이라고도 한다. 道僧(도승)이 四拜(사배)한 이유는 앞산의 지형이 萬甲藏身之形으로 산중이 장군이 태어날 묘터가 한자리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전설은 동민들에게 잘 알려지고 있다.
새두들·봉구(鳳邱) 村) 본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매봉산의 형상이 매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새가 살지 못했다고 하며 동네가 생기고 사람들이 숲을 가꾸니 새들이 날아와서 살았다고 하여 새두들이라 한다.
새말·신촌(新村) 村) 농토를 따라 한 집 두 집 모여서 살게 되었고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마을이라 칭하게 되었다.
용바우·용암(龍岩) 村) 마을 입구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용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바위에 雲行雨施(운행우시) 龍臥花岩(용와화암)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은 金奎秀(김규수)의 글씨라 전한다.
재궁물 村) 용바위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이 마을에는 재궁이 있다.
愚 谷 里
(우곡리)
무덤실·매곡(梅谷) 村) 옛날에 이 마을 뒤편에 기를 굽는 옹기굴이 있었으며 동민들이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을 주위에 梅花나무가 많아서 매화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하여 일명 梅谷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할미골·비기실·비곡(飛谷) 村) 비기실 뒷골을 할미골이라 하는데 딸을 다섯이나 둔 할머니가 살다가 老後에 딸들이 집을 찾아 가서 살려 했으나 딸들의 구박이 심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오던 중 비기실 귓골에서 쓰러져 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죽은 노파를 ane어주고 이골을 할미골이라 불렀다. 그 할머니 무덤에는 지금도 해마다 할미꽃이 핀다고 한다.
우수골·우곡(愚谷)·독지곡(獨池谷) 村) 옛날에는 獨池谷이라 하였으며 마을 뒤편에 땀띠에 특효가 잇는 약수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우수골 또는 愚谷(우곡)이란 동명은 자기 洞里(동리)를 낮추며 他洞(타동)을 높인다는 뜻에서 유래된 동명이라 한다.
맴정·매암정(梅岩亭) 村) 옛날에 海岩(해암) 孫興慶(손흥경)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으며 이 사람이 늘 큰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를 즐겼으며 그 바위에 정자를 짓고 자기의 號를 따서 梅岩字(매암자)이라 했다 孫興慶(손흥경)의 후손들이 지금도 보계리의 불바위라는 동네에 살고 있다.
林 谷 里
(임곡리)
숲실·곰마·임곡(林谷) 村) 본래 順興郡(순흥군) 봉양면의 지역으로서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숲실 또는 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곡 1里(리)로 개편되었다.
고마을·고촌(庫村) 村) 소백산맥을 등진 山村으로 1914년 전 봉양면 당시 면소재지에 인접한 부락으로 面倉庫(면창고)가 있어 고마을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농외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한밤실·새골·소골·대율(大栗) 村) 밤나무가 많고 밤의 생산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奉化(봉화) 琴氏(금씨)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수 가구만 남고 그 외는 淸州(청주) 鄭氏(정씨)등 각성이 우거하고 있다.
쇳골·샘골 村) 임곡(林谷) 2里(리)에서 파생된 산촌이며 소백산맥을 뒤로하여 초원이 좋아 養畜(양축)의 적지로서 가축의 放牧(방목)으로 생계를 이은 몇 가구의 농가가 산재하고 있었으나 6.25 동란 때 이주되었고 지금은 再入住(재입주)하여 담배·과수 등을 재배하고 있다.
덕거리(德巨里) 村) 한밤실을 거쳐 마구령 입구 산록에 자리 잡은 수 가구의 路邊(로변) 주막촌으로서 南大里(남대리)·寧越(영월)·의풍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옛 행인들이 내왕 중 여기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두들·당고 村) 庫村(고촌) 北方(북방) 1km 지점의 소백산맥 깊숙한 곳에 몇 가구의 火田民(화전민)들의 보금자리였으나 6.25 동란 전 공비 소탕 작전 때 소개되었으며 현재는 폐동이 되고 자취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웃숲실·상임곡(上林谷) 村) 林谷(임곡) 1里(리) 本洞(본동)으로 옛날 봉양면 당시에는 면 소재지였기에 편의상 上下 부락으로 구분되어 불려졌을 뿐 행정 동리는 한 마을로 숲실이라 부른다.

상망동 지명유래

상망동 지명유래
지명 유래
상망동 배치암(裵致岩)이라는 선비가 이곳을 개척한 후 치바위 아래서 살았는데 거기서 마을을 넘어다 보인다고 하여 망동(望洞) 또는 보름골이라 불렀으며, 치바위 위의 마을이라 하여 상망동(上望洞)이라 칭하게 됨.

하망동 지명유래

지명유래
지명 유래
하망동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계이씨 일족이 강원도 명주군 옥계에서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보름(15일)만에 지금의 보름골에 이르러 터전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고 하여 보름달 망望 · 마을 동洞자를 써서 「망동望洞 」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마을 이름이 한글로 바뀌어져 「보름골(상망)上望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상망(웃보름골) 마을 아래쪽에 있는 아랫보름골은 아래 하下자를 써서 하망동下望洞이라 하였다.

영주1동 지명유래

영주1동 지명유래
지명 유래
영주
(榮州)
영주의 중심지인 영주초등학교 · 제일교회 · 영광중학교 · 중앙시장 · 영주시농협 · 분수대 · 국민은행 · 구성공원 · 상공회의소 · 강변아파트 · 영일초등학교 · 여성복지회관 · 서천교까지 이어지는 넓은 지역이 있는데, 이곳을 『영주동(洞)』이라 불러오고 있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이 배출된 고향이나 외향(外鄕)에 대하여 고을의 격을 승격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고종 36년(1259년) 최충헌 · 최우 · 최항 ·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을평정하여 정방(政房)을 궁궐로 옮겨 왕정을 복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우리고장 출신인 김인준(金仁俊)을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책봉하고 그의 고향순안順安(옛 영주)을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영주(榮州)로 바뀌었다.
그 후, 조선 태종 13년(1413년) 영주(榮州)를 영천(榮川)으로 개칭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천군 · 풍기군 · 순흥군이 합쳐 영주군이 되면서 옛 지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철탄산
(鐵呑山)
영주초등학교와 영주여자고등학교 뒤편에 영주의 진산(鎭山)이라 일컫는 해발 276m의 우람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을 『철탄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산줄기 형상이 마치 남쪽을 향하여 달리는 말(馬)의 형상으로 쇠를 삼키는 힘찬 말과 같다고 하여 무쇠 철(鐵) · 삼킬 탄呑자를 써서 『철탄(鐵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골
(神社谷)
영주시의회 오른편 골목길을 따라 약 200m 쯤 가면 영주초등학교 뒤편 철탄산 기슭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신사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935년 9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오(남차랑南次郞)가 우리민족의 황민화皇民化를 강요하면서 각 군마다 신사를 만들어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인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참배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이 마을 아래편 영주초등학교 교실 옆에 영주의 신사(神社)가 있었다. 8·15 광복 후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찾아 집을 지어살게 되면서, 옛날 신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신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낙운정
(洛雲亭)
신사골 입구에 김해김씨 일족이 1925년 7월에 건립한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를 『낙운정』이라 불러오고 있다.

영주2동 지명유래

영주2동 지명유래
지명 유래
구성공원
(龜城公園)
구성새마을금고 앞 골목을 따라 가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당 절 뒤편에 낮은 산이 있는데, 이곳을 『구성공원』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 고을마다 성(城)을 쌓도록 하여, 당시 영천 고을에서는 이 봉우리를 요충지로 여겨 흙과 돌로서 성을 쌓았는데, 이 산형상이 마치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이 구(龜)자를 써서『구성산성(龜城山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공원의 동남쪽 경사진 벼랑에는 그 옛날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태종 때에 구성산성의 이름을 따서 고을 이름을『구성(龜城)』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영천군지에 의하면, 당시 성의 둘레는 1,281척, 높이는 9척 이었으며, 성 안에 우물이 하나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고, 또한 무기를 보관하는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왜정시대에 일본이 각 고을마다 민족의 역사적인 유적지의 의미를 잊게 하기 위하여 공원(公園)이란 이름을 붙여서 놀이터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공원 가학루 남쪽 기슭에 진주강씨 집안의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이곳이 와우형(臥牛形)으로 구성산성의 남쪽 봉송대 방향 산줄기가 소의 머리이며, 이 무덤이 소의 배에 해당하여 소가 포근하게 누워있는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공원 아래에 있는 포교당 입구에서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는 조선 고종 임금의 장인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 영천군수(榮川郡守)의 유애비(遺愛碑)외 다섯 점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가학루
(駕鶴樓)
구성공원 정상에 높다란 누각이 있는데, 이 누각을 『가학루』라 불러 오고 있다.
전해오는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누각은 본래 조선시대 영천군 동헌의 문루(門樓)로서 영주초등학교(옛 영천군 관아 터) 뜰에 있었는데, 1923년 군수 전성오(全省吾)가 구성공원 으로 옮겨 세웠다.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이 누각은 옛 동헌의 바깥 문루로서, 학교 운동장을 넓힘에 있어 부득이 철거해야 할 사정이므로, 이건위원회를 구성 하여 관민이 물력(物力)을 내어 구성공원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가학루 전면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며, 후면 편액은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의 글씨이다.
향서당
(鄕序堂)
구성공원 입구 오른편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당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 20년(1371년)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이곳에 『향서당』을 세워 고을 선비들이 공부를 하고, 고을 원로들이 모여서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의논하면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5년(1433년) 군수 반저(潘渚)가 보수하고 규모를 늘렸는데, 그 후, 세조 때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고을 동쪽 5리 안에 정자가 없어 고을을 찾는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기가 어려워 고을 유지들과 의논하여 기금을 모아 규모를 확장하여 증축하였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이곳을 절로 사용하다가, 약 90여 년 전 이 향서당건물을 뜯어서 석공임무소 자리로 옮겨 불상을 모시고 포교당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이 건물을 영천군 봉향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40년 11월 1일 영주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영주읍사무소로 사용하게 되자, 포교당은 다시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으며, 옛 향서당 건물은 석공임무소 사무실 증축으로 헐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성밑
(城底)
구성공원 입구 포교당 앞에서 남쪽 봉송대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성밑(성저)城底』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이 옛날 구성산성(龜城山城) 아래 있다고 하여 『성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재인촌
(才人村)
포교당 오른편에서 불바위 사이에 오래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재인촌(才人村)』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가축을 도살하는 사람(재인) 들이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재인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영주역이 신영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흩어지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불바위
(火岩)
기독병원 앞 길 건너편 골목으로 약 50m 쯤 가면 구성공원 산자락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바위를 『불바위』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바위 봉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뒤새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풍수장이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쳐다보고 “저 바위 봉우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하고 있어 고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풍수 장이에게 불이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더니, “바위 서편 아래에 널따란 못을 파서 물을 가득히 채우면 불기운이 약해져서 고을이 평안해진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바위 서편 아래에 넓고 깊은 못을 파서 물을 가득히 채워 놓았더니, 그 후 부터는 고을에 큰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바위 아래 파놓았던 못은 고을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녁 서(西)·못 지(池)자를 써서·지(西池)라고 불렀는데, 1961년 7월 11일 영주 대홍수로 인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바위 봉우리가 마치 짐승의 뿔(각角)을 닮은 형상이라고 하여 『뿔바위(각암角岩)』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봉송대
(奉松臺)
소디프신소재 기숙사 뒤편으로 시민회관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우뚝솟은 바위봉우리 위에 정자가 있는데, 이곳을 『봉송대』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이 봉송대는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었던 것을 영주에 사는 안동권씨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좌사간(左司諫)을 지낸 안동권씨 정定이 고려가 조선에 망하자, 고려 왕조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송도(松都)(고려의 수도)를 그리워『봉송대(奉松臺)』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쪽박소 봉송대 암벽 아래에 옛날 서천의 물길이 흐르고 있을 때, 세찬 물길이 소용돌이치며 감도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沼를 『쪽박소』라 불러오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낚시와 뱃놀이를 즐겼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해마다 여름이 되면 멱을 감던 많은 사람들이 이 소(沼)에 빠져 목숨을 잃었기에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 소沼 가까이에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구호동
(鷗湖洞)
봉송대 오른편 옆길을 지나가면 구성공원 서편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구호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정조 때 향내(鄕內)유림에서 세운 구호서원(鷗湖書院)이 언덕위에 있었다고 하여 『구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반구정
(伴鷗亭)
봉송대 옆을 지나 약 100m 즘 가면 구성공원 서편 끝자락 둔덕에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옛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을 『반구정』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말 충절을 지킨 좌사간(左司諫) 권정(權定)이 옛 고려(高麗)로 돌아온다. 라는 뜻으로 반구정(返舊亭)으로 명하였으나 후학들이 왕의 미움을 살 것을 우려하여 반구정(伴鷗亭)이라 칭하였다고함, 조선 정조 4년(1780년) 안동권씨 후손들이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던 정자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없어진 구호서원(鷗湖書院)이 이곳 옆에 있었다고 한다.
동구대
(東龜臺)
아카데미여관 뒤편으로 시민회관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우뚝솟은 바위봉우리 위에·봉송대가 있는데 이 봉우리를 『동구대』라 불러오고 있으며, 중앙선 철길 건너 영주2동사무소 뒤편 대순진리회 교당 뒤편에 있는 바위 산 둔덕을 『서구대』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태종 때 지금의 구성공원이 마치 거북이 형상이라고 하여 영주를·구성(龜城)이라 불렀는데, 당시 서천 물길이 시민회관 앞을 지나 상공회의소 앞으로 흘러내릴 때 동쪽에 있는봉송대 바위 봉우리가 마치 거북이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동구대(東龜臺)』, 대순진리회 교당 뒤편 산 둔덕 바위는 서쪽에 있는 거북이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 『서구대(西龜臺)』라 불렀다고 한다.
구성
오거리
농협영주시지부에서 성누가병원 방향으로 약 300m 쯤 가면 공설시장 · 성누가병원 · 영주농협 · 영주우체국 방향으로 연결되는 다섯 갈레길이 있는데, 이 길이 구성공원과 연결된다고 하여 『구성오거리』라 불러 오고 있다.
구-예천
통로
구성오거리에서 가고파극장 · 삼성생명(뒷편) · 소디프신소재 기숙사까지 연결되는 좁은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을 『구-예천통로』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이 길은 영주에서 예천 · 상주 방향으로 가는 외통길로서 지금의 넓은 도로가 생기기 전에 삼양자동차정비공장 방향으로 연결되어 예천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하여 『구-예천통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휴천1동 지명유래

휴천1동 지명유래
지명 유래
휴천
(休川)
원래 휴천(休川)이라는 명칭(名稱)은 마을 앞으로 서천(西川)의 물이 자주 말라 붙어 물이 흐르지 않는 때가 많아 내(川)가 쉬어 흐른다는 뜻에서 休川이라 부르게 되었음.
둘구비
또는
둘개비
자연부락인 둘구비(二曲:현재 7통)는 마을앞에 있는 내(川)가 두 갈래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물줄기의 모양에서 지금도 마을 이름을 둘개비 또는 둘구비라고 부르고 있음.
구서원
(舊書院)
또 하나의 자연부락인 구서원(舊書院:현재 7통)은 조선 명종 13년 郡守 안상(安常)이 이퇴계(退溪)선생을 향(享)하기 위해 이곳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을 創建하였는데, 옛날 書院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구서원(舊書院)이라 부르게 되었음.
광승
(廣昇)
일명 광심이라고 하며, 마을 뒤 송림(松林)이 무성한 산속에 옛날 광승사(廣昇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이름에 연유(緣由)하여 마을 이름을 광승이라고 부르고 있음(현재 4, 6, 8통 지역)

휴천2동 지명유래

휴천2동 지명유래
지명 유래
휴천
(休川)
마을 앞을 흐르는 서천의 물이 자주 말라 붙어 물이 흐르지 않는 때가 많아 내가 쉬어 흐른다는 뜻에서 휴천이라 부르게 됨.
지천
(芝川)
조선 태조때 하 륜이 영주군수로 재임당시 남쪽 이 하늘을 돋을 정도로 높다 하여 지천(支川)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변하여 지금은 지천(芝川)이 됨.

휴천3동 지명유래

휴천3동 지명유래
지명 자연부락 유래
조암동
(槽岩洞)
조암(槽岩) 1980. 04. 01 영풍군 이산면에서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주시에 편입됨.
전단(箭丹) 단양 군수 신세인이 왜란을 당하여 피란 길에 죽령 고개에 올라, 신에게 정착지를 인도해 줄 것을 기도하고, 화살 끝에 붉은 천을 달고 활을 힘껏 당기니 지금의 전단 땅에 꽃혀, 이곳을 정착지로 하였다고 하며 이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전단이라 불렀다고 함.
초곡(草谷) 새일, 사일(沙日) 옛날 고창 오씨가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이 곳은 초목이 무성하여 草谷이라 칭하여 오다가 그 후 이동네 앞을 흐르는 남원천의 모래 사장이 곱고 깨끗하여 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함.
수청(水淸) 이 곳을 흐르는 강물이 너무 맑아 산수가 투명하게 비쳐서 마치 동양화의 그림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물이 맑다고 하여 수청거리라 불렀다 함.
노현(魯峴) 옛날 순흥 안씨의 정착지었으며, 마을 주변의 산수가 노루가 뛰는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노루고개라 함
독주곡(獨朱谷) 전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처음에는 주씨들과 각성들이 함께 모여 살았는데 타성들은 차츰 다른곳으로 이사 가고 주씨들만 남아 살게 되었다고 하여 독주곡이라 함.
적서동
(赤西洞)
질바들 도평(陶坪) 1980. 04. 01 영풍군 문수면에서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주시에 편입됨.
이 동리에서는 그릇을 만드는 양질의 흙이 많아 질그릇을 굽던 곳이라고 질바들이라 불렀다고 함.
율리(栗里) 방갓, 적서(赤西) 약 250년전 안동 김씨가 이 곳에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산에 한양 조씨 청화공 묘 비문에 栗枝라고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불리어 오다가 차츰 변하여 율리라고 불렀다고 함.
아치나리 아천(鵝川) 의성인(義城人) 금(金)씨가 안동 예안에서 이주해 와 이 마을을 개척 하였으며, 마을의 앞내와 산세가 아름답다고 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함.
연동(蓮洞) 아천에 거주하던 의성 김씨가 번성하여 그 후손이 연화산 동쪽골까지 뻗어 이 곳을 별도로 연동골이라 부름.
자래못 연동골 마을 안에 자래못이라고 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이 못의 으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자래못이라고 불러 왔으나 6.25동란 이후 폐촌이 되고 없어짐

가흥1동 지명유래

가흥1동 지명유래
지명 유래
가흥
(可興)
광복후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큰절이 있다고 한절마, 부자가 되길 기원하는 뜻에서 대부내(大富村)등 자연부락이 있음
문정
(文亭)
글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많아서 글밭(文田)이라는 지명과 큰 하천이 있어 항상 시원하고 큰 정자도 있어 한정(寒亭)이라 하였으며 문전(文田)과 한정(寒亭)을 합하여 문정(文亭)이라 하였음

가흥2동 지명유래

가흥2동 지명유래
지명 자연부락 유래
고현동 고현(古峴) 조선 명종 때 반남박씨 일족이 귀내마을에 터전을 이루어 살았을 때, 당시 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서있는 둔덕 아래로 시냇물이 흘러내려 느티나무 괴(槐) · 내 천(川)자를 써서 『괴천槐川(괴내)』 또는 옛 고古 · 내 천(川)자를 써서 『고천(古川)』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귀내』라 불러오고 있다.
귀내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1.2 km 쯤 가면 장수고개 마을이 있는데, 옛날 마을 뒷산 고갯길을 통하여 멀리 동해에서 소금장수와 생선장수들이 등짐을 지고 넘나들었다고 하여 장수 상商 · 고개 현(峴)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상현(商峴)(장수고개)』이라 불러오고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고천(古川) 마을의 고(古)자와 상현(商峴) 마을의 현(峴)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고현(古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핑구재 서천폭포에서 도로 오른편을 따라 약 200m 쯤 가면 갈림길이 있고, 그곳에서 약 200m쯤 가서 가흥정수장 앞 영암건널목을 건너 약 100m쯤 가면 오른편으로 영광여자중학교 방향으로 너머 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핑구재』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겨울에 소백산에서 내려 부는 찬 바람이 이 고개를 지나면서 핑핑 소리가 난다 하여 고개 이름을 『핑구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새마 핑구재 입구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300m쯤 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새마(신촌)新村』라 불러오고 있다.
귀내보트장 새마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100m쯤 가면 왼편에 그리 넓지 않은 못이 있는데, 40여 년 전 까지만 하여도 이곳에서 보트를 띄워 놀이를 즐겼다고 하여 이곳을 『귀내보트장』이라 불러오고 있다.
성재(城峰) 동수나무 성황당 뒤편으로 해발 309m의 높다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를 『성재(성봉)城峰』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봉우리를 『고모당산(姑母堂山)』이라 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봉우리에 고현산성(古峴山城)이 있었다고 하여 『성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귀내 귀내보트장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400m쯤 가면 오른편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귀내(槐川)』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 반남박씨 형珩이라는 선비가 터전을 이루어 살았는데, 당시 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서있는 둔덕 아래로 시냇물이 흘러내려 느티나무 괴(槐) · 내 천川자를 써서 『괴천(괴내)(槐川)』 또는 옛 고古 · 내 천(川)자를 써서 『고천(古川)』이라 불렀 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발음이 변하여『귀내』라 불러오고 있다.
이 마을은 본 마을을 아랫귀내 웃마을을 웃귀내라 부르고 있다.
태봉(胎封) 귀내 마을 동편 숲 속에 괴정(槐亭)이라는 작은 정자 옆에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는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를 『태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어느 왕세손의 태(胎)를 봉안한 곳이라 하여 태실胎室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발음이 바뀌어『태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왜정시대에 일본인들이 태실을 도굴하여 백자(白磁) 태호(胎壺)(항아리)가 출토 되었는데, 이를 귀하게 여긴 일본인이 가져갔다고 한다.
중산골 고현교에서 오른편 갓골 마을 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오른편으로 시립화장장 방향으로 가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중산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 이곳에 절골 스님들의 공양처가 있었다고 한다.
정불리골(淨佛里) 철탄산산당 입구에서 시립화장장 방향 오른편으로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 정불사(淨佛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정불리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큰골 정불리골에서 시립화장장 방향 왼편으로 긴 골짜기가 있는데, 골짜기가 길고 넓다 하여『큰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던지미골 고현2교를 건너 농로를 따라 약 300m쯤 가면 왼편에 폐비닐을 매립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던지미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웃귀내 고현교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300m쯤 가면 KBS중계소가 있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귀내 마을 윗편에 있다고 하여『웃귀내』라 불러오고 있다.
골안 웃귀내 KBS중계소 길 건너편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하여 『골안』이라 불러 오고 있다.
탑골(塔谷) 골안 마을에서 오른편 산길을 따라 약 300m쯤 작은 고개를 너머 가면?천운사라는 암자가 있는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이곳 절터에 석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40여 년 전 까지만 하여도 석탑의 면석面石 등이 남아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하여 다른 사찰로 옮겨져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장수고개(商峴) 장수고개 성황당 입구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300m쯤 가면 오른편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장수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 산 고갯길을 통하여 멀리 동해에서 소금장수와 생선장수들이 등짐을 지고 넘나들었다고 하여 장수 상(商) · 고개 현(峴)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장수고개(商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우재 장수고개 마을 뒤편으로 높다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를 『봉우재』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왜적의 침입이나 나라의 변고가 있을 때 이 산봉우리에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워 알리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하여 『봉우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산을 성내산(城內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아지동(阿芝洞) 장수교를 건너가면 왼편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아지동』이라 불러 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중종 때 전의이씨 개신(蓋臣)이 마을을 지나다가 죽계천 맑은 시냇물과 산세가 아름다워 이곳에 터전을 이루어 살게 되었는데, 마을이 아주 작으면서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여 작을 아(阿) · 아름다울 지(芝)자를 써서 『아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래 이 마을은 영풍군 안정면 아지동이었는데, 1980년 4월 1일 영주읍이 시(市)로 승격되면서 가흥2동으로 편입되었다.
세시골 아지동 마을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300m쯤 가면 왼편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세시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창진동 창진昌津 국도유지사무소를 지나 남원천 창진교 다리와 중앙선 철길을 건너 약 400m 쯤 가면 창부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중앙관리들이 지방으로 출장하면서 말을 갈아타던 창보역(昌保驛)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창보(昌保)』라 불렀다.
이 창보마을 입구 세 갈레 길에서 오른편 산 아랫길로 약 300m 쯤 가면서늘기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앞으로 순흥면에서 흘러내리는 죽계천 · 안정면에서 흘러내리는 홍교천 · 풍기에서 흘러내리는 남원천 세 물길이 이 마을 앞에서 합류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석 삼三 · 나루 진(津)자를 써서 『삼진(三津)』이라 불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창보 마을의 창(昌) ·삼진 마을의 진(津)자를 써서 『창진(昌津)』이라 하였다.
창부昌保 국도유지사무소를 지나 창진교를 건너서 중앙선 철길을 건너 약 400m 쯤 가면 큰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창부』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은 조선시대 관리들이 지방으로 출장하면서 말을 갈아타던 창보역(昌保驛)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창보(昌保)』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창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영천군지에 의하면 당시 창보역에는 역리(驛吏) 26인 · 노비 13인 · 대마 1필 · 중마 3필 · 하마 10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옛날 창보역에서 말을 키우던 마장(馬場)터 흔적이 중앙선 철길 옆 논 가운데에 둔덕을 이루어 남아 있다.
약수동 창부마을 창진부녀회수퍼마켓에서 아지동쓰레기매립장 방향으로 약 700m 쯤 가면 오른편에 인삼밭이 있는데, 이곳을『약수동』이라 불러 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곳 논 가운데에 약물이 샘솟아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하여 『약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재궁고개 약수동에서 아지동쓰레기매립장 방향 오르막길로 약 300m 쯤 가면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재궁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고개 너머에 재궁(齋宮)이 있었다고 하여 『재궁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 골 제궁고개 너머 왼편에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고개 너머에 재궁(齋宮)이 있었다고 하여 『재궁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바우골 제궁고개를 너머 약 700m 쯤 가면 안정면 오계리 보치골과 이어지는 넓은 들이 있는데, 이곳을 『고바우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해 질 무렵 한 스님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자 “우리 집에 늘 나그네들이 많이 찾아오니 제발 오지 않도록 해주면 시주를 하겠다.”고 부자가 말하였더니, 스님이“ 마을 앞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깨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자 부자가 바로 하인을 시켜 바위를 깨트려 버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부자집의 가세가 기울어져 마을을 떠나버렸는데, 바로 그 바위가 벼를 보관하는 창고(고庫)였으므로 부자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여 『고바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제방 둑을 따라 내려가면 웃서늘기 마을로 이어진다.
서늘기 서늘기 마을 앞으로 순흥면에서 흘러내리는 죽계천 · 안정면에서 흘러 내리는 홍교천 · 풍기에서 흘러내리는 남원천 세 물길이 이 마을 앞에서 합류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석 삼三 · 나루 진(津)자를 써서『삼진(三津)』 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마을 이름을 『서늘기』라 불러 오고 있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 뒤편 무동산 마루에 넓다란 무동바위주변 서늘한 그늘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서늘기』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랫서늘기 창진교를 건너 중앙선 건널목을 지나 약 300m 쯤 가서 세 갈레 길에서 오른편 산 아랫길로 약 300m쯤 가면 창진교회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아랫서늘기』라 불러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함창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웃서늘기 아랫서늘기에서 윗편 산 아래 길로 약 600m쯤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웃서늘기』라 불러오고 있다.
이 마을 북쪽 농로를 따라가면 『고바우골』로 이어진다.
풀미골 웃서늘기 마을 뒤편으로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풀미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상줄동 상줄(上茁) 나무고개를 너머 안정 방향 비상활주로를 따라 약 1km 쯤 가서 왼편 농로를 따라 약 600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줄포(茁浦)』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인조 때 나주정씨(羅州丁氏)들이 강원도 원주에서 이주해와 살면서 마을 앞 물가에 줄(茁)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하여 줄 줄(茁) · 물가 포(浦)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줄포』라 불렀으며, 윗마을을 『상줄(上茁)』· 아랫마을 『필두(筆頭)』마을을 『하줄(下茁)』이라 불러왔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윗마을인 줄포마을의 상줄(上茁)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상줄(上茁)』이라 하였다.
재궁골 장승배기에서 서편 농로를 따라 필두마을 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왼편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 안동김씨 재궁齋宮이 있었다고 하여 『재궁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필두(筆頭) 재궁골 입구에서 농로를 따라 약 100m쯤 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필두(筆頭)』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안동김씨 · 안동권씨 · 순흥안씨 · 평해황씨들이 이주하여 살면서 서로 돕고 잘 살자는 뜻에서 도울 필(弼) · 집 대(臺)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필대(弼臺)라고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필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모래밭골 필두마을 뒤편 남서쪽으로 약 500m쯤 가면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 너머 골짜기를 『모래밭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골자기를 내려가면 장수면 반지미 마을로 이어진다.
솔안마 영주자동차학원 입구에서 오른편 길을 따라 약 600m쯤 가면 상줄교회가 있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솔안마』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 안 쪽에 소나무가 무성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솔안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당마 솔안마 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약 400m쯤 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서당마』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에 첫 입향한 나주정씨들이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철종 7년(1856년) 봉강서당(鳳崗書堂)을 세웠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서당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너서리 서당마에서 서쪽 오르막길을 따라 약 400m쯤 가면 굴다리 너머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너서리』라 불러오고 있다.
이 마을에서 남쪽길로는 안정면 묵리와 이어지고, 북쪽길로는 안정면 내줄리 마을로 이어진다.
가흥동 서천교(西川橋) 시외버스터미날에서 중앙선 철길 위 고가도로를 지나가면 서천을 가로지른 긴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가 서천(西川)에 있다 하여 『서천교』라 불러오고 있다.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다리는 왜정시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처음 세워졌는데, 영주에서 풍기 · 단양 ·서울로 가는 모든 차량들이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고 한다.
배고개 서천교를 건너 왼쪽 강변도로를 따라 약 400m쯤 가면 주공3단지 아파트가 있고, 아파트 입구에서 오른편 농로를 따라 약 300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배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중기에 창원황씨 일족이 이주하여 살면서 한양(漢陽) 배고개(이현(梨峴))에 살던 지명을 따서 마을 이름을『배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창원황씨 후손이 안정면 용산리 대룡산 순흥안씨 댁으로 장가들어 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텃골 배고개 마을 노인정 앞 오르막 고개를 너머 가면 긴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텃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지비장골 배고개 마을에서 시립도서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지비장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도화동(桃花洞) 서천교를 건너 풍기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제일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도화동』이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곳은 풍기 고을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酒幕)에 작부(酌婦)들이 많아 이들을 복숭아꽃에 비유하여 도화(桃花)라고 불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도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는 이 마을을『윈기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샘골 제일고등학교에서 풍기방향으로 약 400m쯤 가서 오른편에 형제천막 옆길을 따라 가면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샘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마을이 개척될 때 이곳이 지대가높은 곳임에도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고 하여 『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고개 제일고등학교를 지나 풍기방향으로 약 500m쯤 오르막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나무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때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고을 산천을 둘러보고 서쪽이 허실하여 고을에 재난이 많이 일어나고 인재가 나지 않으므로 이 고개 주변에 나무를 심어숲을 이루게 하였다고 하여 고개 이름을 『나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고개 마루에 수 백 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지나가는 길손들이 쉬어갔다고 하여 『나무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도화동마을에 복숭아 꽃을 찾아오는나비들이 많아 『나비고개(접현)蝶峴』라 불렀는데, 이 나비가 나부 그리고 나무로 변하여 『나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굴미 거치실 입구에 에너벨리라는 레스토랑이 있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도굴미』라 불러 오고 있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오래 전에 이곳에 조림용 묘목을 기른 곳이라고 하여 『묘포장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꺼치실 제일고등학교 입구에서 풍기방향으로 약 200m쯤 가면 왼쪽으로 십자 정신요양원이 있는 방향으로 긴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꺼치실』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가난한 사람들이 죽으면 관棺을 마련할 돈이 없어 거친 가마니에 둘둘 싸서 이 골짜기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하여 『꺼치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지골(仙池谷) 십자정신요양원 입구에서 장수면 반지미 방향으로 약 400m쯤 가서 굴다리를 바로 지나면 논이 있는데, 이곳을『선지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던 못이 있었다 하여『선지골(仙池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너니골 선지골 입구에서 노인전문요양원 자비동산이 있는 골짜기로 약 400m쯤 가면 왼편으로 이어진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너니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배나무고개 너니골 서쪽으로 장수면 두전리 아랫반지미 마을로 너머 가는 고개가 있는데, 옛날 이 고개 마루에 배나무가 있었다고 하여『배나무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불개미지골 선지골 입구에서 장수면 반지미 마을 방향으로 약 200m쯤 가면 왼편에 대현사 절 뒤편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을 『불개미지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사바리고개 불개미지골 입구에서 장수면 반지미 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오르막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사바리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딱따리미 서천교에서 오른편 강변로를 따라 약 600m쯤 가면 왼편에 시영아파트와 소백산관광호텔이 있는데, 이곳을 『딱따리미』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약 100여 년 전 필두 마을에 살던 안동 권씨 일족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당시 마을 앞 물가에 딱딱한 바위가 마치 짐승의 꼬리 같이 길게 뻗치어져 있다고 하여 꼬리 미(尾)자를 써서 『딱따리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밤디들(栗坪) 딱다리미에서 창진동 방향으로 약 400m쯤 가면 국도유지영주사무소 맞은 편에 비닐하우스가 많은 넓은 들이 있는데, 이곳을『밤디들』이라 불러 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시청에서 이곳을 『율평들(栗坪)』이라 불러오고 있다.